"나는 현재이며, 과거이며, 또한 미래이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탄생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더욱 젊고 활기차게 변해간다..."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
◆ 클로드 루이 드 생 제르맹 백작(Claude Louis Comte de Saint-Germain) ◆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 제르망 백작의 초상화. (작가 미상)
'신비의 사나이" 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18세기의 모험가.
혹자는 그를 입만 살아있는 희대의 사기꾼이라 하고, 혹자는 그를 당대 최고의 신비주의자라고도 하지만, 그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바람처럼 유럽에 나타났고, 마찬가지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불로불사의 영약'과 '현자의 돌'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떠벌리며, 수많은 예언과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매료했다. 그는 '실제로 분명한 마법을 한번도 부리지 않고서도 마법사로 가장해 명성과 돈을 번 흥미 있는 사례'로 손꼽히기도 한다.
● 이름 ●
생 제르망 백작이 그의 본명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본인도 "이 이름은 가명이지만, 내가 생 제르맹을 자칭하는 한, 나는 어디까지나 생 제르맹이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개의 가명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라츠코치 공, 생 마르탱 백작, 알리에 후작, 쉬르몽의 영주, 웰던 후작(밀라노에서 사용), 몬페라토 후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아이마르와 벨마르의 후작, 벨라마르 백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솔티코프 백작(제노바에서 사용), 쇠닝 기사(피사에서 사용), 차로지 백작(슈벨바흐에서 사용) 등등...
● 탄생 ●
생 제르망 백작의 정확한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어 왔다.
첫번째는 그가 1690년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미망인과 그녀가 베이욘에서 만난 아나데로 백작이라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스페인 왕비의 이름은 마리 드 뇌부르라고 하며, 훗날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희곡 작품『뤼 블라(Ruy Blas, 1838년)』에서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두번째는 그가 아이마르라는 이름의 유대계 포르투갈인의 아들로서 1710년에 태어났다는 설, 그리고 세번째는 그가 알자스 출신의 볼프라는 유대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둘 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퍼뜨린 소문에 근거한다.
가장 나중에 제기된 설은 그가 1712년경에 지벤뵈르겐(Siebenbuergen)에서 트란실바니아의 대공인 프란츠 라코치 2세와 그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라코치 대공의 아이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감시 아래 자라나게 되었으나, 그들 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사실은 살아있어서, 메디치 가의 마지막 후손에게 맡겨져 이탈리아에서 성장했다.
그는 자기가 어릴 때 수 년간 살았고 그의 아버지가 영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던 작은 마을 산 제르마노의 이름에 착안하여 생 제르맹이라는 가명을 고안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남쪽 나라의 풍경과 햇빛 비치는 궁전들을 언급했는데, 그 기억이 바로 이 시절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어릴 때 헤어진 그의 두 형제들이 각각 성 찰스와 성 엘리자베스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그 성인들의 성스러운 형제인 성 게르마누스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루이 15세가 그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한 것이나, 백작이 자기의 비밀을 맡겼을 만한 사람들이 철석같이 비밀을 지켰던 것도, 라코치 2세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오스트리아 황제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갔을 때의 결과를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밖에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출신이라던가, 헝가리 혈통이라던가, 실은 1561년에 태어났다던가 하는 설도 난무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백작 자신이 스스로 자기 아버지는 비밀기사단원이고 어머니는 밀교의 사제라고 밝혔다고도 하나, 신빙성은 떨어진다.
백작은 1723년에 드 장리스 부인의 어머니인 드 장리스 백작부인과 만나, 자기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자기 모친의 초상화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조그마한 그림 속의 여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백작부인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의상을 입고 있었다.
"대체 이 의상은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건가요?"
백작은 그냥 미소만 지어보이더니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35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을 살면서 유럽 역사의 여기저기에 여러 가지 신분으로 간섭했다고 믿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프랜시스 베이컨,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먼드 스펜서, 몽테뉴, 로버트 버튼, 세르반테스, 발렌타인 안드레아스, 가발리 백작(Comte de Gabalis) 등이 바로 백작의 가명이라는 것이다.
장미십자회(薔薇十字會, Rosicrucians)의 전설적인 시조(始祖)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바로 생 제르맹 본인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이다.
또다른 황당무계한 주장에 따르면 그는 5만 년 전에 지금의 사하라 사막이 있는 곳에 번창했던 초고대 문명의 통치자로 태어났는데, 서서히 육욕(肉慾)에 물들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절망하여 그 낙원을 버리고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이후 아틀란티스의 대사제, 선지자 사무엘, 예수의 아버지 요셉, 로마에서 순교한 성자 알반(Alban),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 프로클루스, 캐멀롯의 마법사 멀린, 로저 베이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생 제르맹 백작으로 환생을 거듭하며 역사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 중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스웨덴의 신비철학자이자 기술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가 그의 또다른 모습이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 방랑 ●
이러한 추측보다 더욱 오래되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바로 '방랑하는 유대인'에 관한 전설이다.
이 전설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동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을 유럽에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는 카타필루스(Cartaphilus)라는 유대인 문지기가 있었는데, 그는 나사렛 예수가 재판을 받을 때에도 참석했다.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 고행의 길을 걸어가다가 지쳐서 잠시 쉬려고 멈춰섰을 때, 길 옆에 늘어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속에서 카타필루스가 뛰쳐나와 예수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예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자네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예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가던 로마 병사들이 카타필루스를 군중들 쪽으로 다시 밀어넣었고, 예수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타필루스는 자칭 메시아라는 사내가 자기에게 내뱉은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십수년 후, 친구들은 모두 늙어 죽어가는데도 자기 혼자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게 되자, 그 유대인 문지기는 예수의 말을 기억해 내고 전율에 온몸을 떨었다.
그는 결국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성직자들은 이런 이야기가 단순히 종교적인 농담에 불과하다며 무시했고, 급기야 이 이야기는 예수를 자기들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라며 내쳐버린 유대인들이 그 벌로써 나라를 잃고 방랑하게 된 역사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설은 중세를 거치면서 유럽의 민담 속에 편입되어,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13세기에 동방에 갔다온 많은 여행자들이 자기가 카타필루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비슷한 보고가 줄을 지었다.
그리고 각각의 조우(遭遇)는 점점 서유럽과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던 1740년의 어느 날, 검은 비단옷을 입은 무명의 신사가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생 제르맹 백작이라고 칭했다.
그의 특이한 언행과 값비싼 장신구는 파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잘생긴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유대계의 특징을 보고, 미신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은 그야말로 방랑하는 유대인 카타필루스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어느 독일 장군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파리의 사교계에 드나들게 되었다.
● 인물 ●
생 제르맹 백작은 '중간 정도의 키에, 탄탄하게 단련된 몸매를 지녔고, 놀랄 만큼 간소하게 차려입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드 오세 부인(Madame de Hausset)이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방문하는 그의 모습을 묘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섬세하고도 재치있는 태도를 가졌으며, 매우 단순하지만 고상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정교하게 제작된 담뱃갑과 시계를 가지고 다녔다.
눈은 크고 갈색, 머리는 까만 밤색이고 치렁치렁하며, 신장은 170센티 전후, 얼굴이 긴 편으로 곧게 뻗은 콧등은 고귀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희미한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있다. 목소리는 맑고 명쾌했다.
그는 아무리 높은 사람을 만나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식의 화법을 사용했다.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감에 가득찬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아담하고 날씬한 체구와, 온화하고 우아한 몸가짐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를 지을 줄 알았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데마르 백작부인도 "오, 세상에나! 태어나서 이제까지 그처럼 멋진 눈동자는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 친교 ●
유럽 각국의 귀족들이 오컬트나 연금술, 비밀결사, 마법 등의 화제에 몰두하던 시절에, 불로불사의 영약을 지니고 있으며 마음대로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소문난 이 희한한 남자는 세인들의 끊임없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냉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점성술에 대해 흥미를 보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기에 절대로 안 죽는 사내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프랑스의 미라보 백작은 여기에 덧붙여 "그는 언제나 조심성없이 굴더니만, 결국 자기의 선대(先代)들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마저 까먹은 모양이다."라고 비꼬았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나 장 자크 루소와도 친분이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가 그와의 친교로 인해 궁정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는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희한한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흥미를 느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소재를 알아내고는, 그를 궁전으로 초대했다. 백작은 초대를 받아들여 왕을 방문했고, 탁월한 언변으로 왕과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당시 왕은 백작과 후작부인과 셋이서 방에 틀어박혀 대화를 나누느라 저녁 내내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드 오세 부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왕은 생 제르맹이 상당히 고귀한 출생 배경을 가진 것처럼 말했다고 한다.
카를 폰 헤세 카셀 백작(혹은 헤센의 카셀 영주, 카를 폰 헤세 대공) 또한 생 제르맹과 인연이 깊은 인물인데, 그는 여러 해 동안 백작과 함께 연금술 실험(흑마술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을 해 왔고, 백작은 그를 동등한 친구로서 대했다.
생 제르맹이 1784년에 (공식적으로) 세상을 뜨기 전에 자기의 서류들을 맡긴 것도 헤세 카셀 백작이었다.
하지만 루이 15세도 헤세 카셀 백작도 생 제르맹의 출생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실도 밝힌 바가 없다.
백작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이 늘상 빠지게 마련인 엄숙주의의 함정에 말려들지 않고 자유로운 개성을 유지했다.
그는 당대의 어여쁜 여인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즐기기도 했다.
비록 그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지만, 순전히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즐기기 위해 외식 자리에 끼여들곤 했다.
그는 어떤 신분의 사람 앞에서도 절대로 기죽지 않는 귀족적인 품성을 지녔으며 심지어는 각국의 왕족들과도 동등하게 지냈다. 그는 피부의 주름을 없애거나 흰머리를 염색하는 비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는 또한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로 좌중을 열광케 만드는 재주도 갖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자기과시욕이 강한 현학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는 진술도 전해진다.
제라르 드 네르발의 『깨달은 자들』은 백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의 회고록들에 의하면, (그는) 사기꾼에게나 어울리는 뻔뻔스러움도 없었고 광신자에게 필요한 유창한 언변도 없었으며 피상적인 사람들을 이끄는 유혹도 없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생 제르맹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충실하려고 하며 회원들이 좋은 평판을 받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던 (프리메이슨, Freemasonry) 교단을 오히려 신비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폰 글라이헨 남작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파리에서 명망있는 기사인 랑베르의 집에 머물며 그 딸인 마드무아젤 랑베르의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로슬리의 회상록에는 백작이 네덜란드에서 자기 자신만큼이나 부유하고 수수께끼에 싸인 어느 귀부인과 사귀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이에 따르면, 백작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이 부인 또한 백작과 함께 여러 차례 다른 시기에 목격되었으나, 남편과 마찬가지로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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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제르망.rtf
http://jamiwon.tistory.com/attachment/cfile3.uf@1476CF1349D292B51A0F1A.rt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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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제르망 백작.
프랑스의 생제르망 백작은 지금도 유럽에서는 불로불사의 인간으로 간주되며 여러 가지 신비한 일화를 많이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출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아직도 그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다.
생 제르망 백작. 국적은??
출생에 관하여 일부의 사람들은 그가 프트란실바니아의 지배자였던 프란시스 라코치 2세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또 스페인 찰스 2세의 미망인이 낳았다든지, 포르투갈의 유대인의 아들이라는 등등의 설이 분분하다.. 물론 입증될만한 증거는 없지만.
백작을 자칭하였던 그는 1740년 경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고 1750년대에 루이 15세와 그의 정부인 마담 퐁피두와의 사귐으로 사교계로 진출하였다고 한다.
생 제르망 백작은
생제르망 백작은 학식과 재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났다고 알려진다. 바이올린 연주나 화가, 연금술, 화학 등등의 다양한 재주를 과시하여 일약 사회적인 명사가 된 그는 특히 연금술로 만들어낸 보석을 뭇 여성들에게 아낌없이 뿌려대 신망을 얻었다는 것이다.
생 제르망 백작의 연금술에 대하여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생제르망이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런던 연대기>에는 '불가사의한 이방인에 관한 일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는 탁월하고 고귀한 연금술사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독일에서 프랑스로 왔다. 그는 비밀의 가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만능약이기도 했다. 이 이방인이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의 지출이 이러한 소문을 뒷받침했던 것 같다. 소문이 커지자 당시의 프랑스 대신이 이를 의심하여 그의 비밀을 밝히려 했다. 그는 생제르망이 어디로부터 송금을 받고 있는지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현자의 돌이 어디서 생기는지 그 출처를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비밀을 밝히려는 그 고관의 의도는 매우 사려 깊고 현명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수수께끼만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2년 동안 감시하였지만, 생제르망은 평상시와 같이 생활하며 모든 것을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그 동안 프랑스에 있는 그에게 들어온 송금은 일체 없었다."
연금술 외의 생 제르망 백작의 능력
생제르망은 일부 귀족들 앞에서 변성실험을 하여 보통의 주화나 은화를 금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왕이나 외교관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며 큼직한 다이아몬드와 보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파리의 자택에서 마련한 연회에서는 보석을 디저트 접시에 담아 참석한 귀족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한번은 어떤 공작부인의 청에 못이겨 생명의 약이 든 작은 병을 주었는데, 그것이 술인줄 알고 마셔버린 하녀가 몰라보게 젊어졌다는 믿기지 않는 에피소드도 있다.
생 제르망 백작 이후의 기록들
라모아 제르지 백작부인의 회상록에 의하면, 1710년 무렵 베네치아에 있던 생제르망의 나이는 50세쯤으로 보였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166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는 1737년에서 1746년 사이에 페르시아와 영국, 빈 등에 머물렀다. 8, 90세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1749년에는 파리에 도착하여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만났으며, 1756년에는 인도에서 목격되었다.
1762년에는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쿠데타에 참가하고, 이후로는 프랑스의 샹보르성에서 연금술과 화학실험에 종사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그리고 1768년에는 베를린에 있었고, 그 다음해는 이탈리아, 코르시카, 튀니스를 여행하였으며, 1770년에는 러시아 해군이 이탈리아에 입항했을 때 오를로프 백작에게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이때 그는 러시아 장군 복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1770년대에는 독일에 체류하면서 샤를 왕자와 함께 프리메이슨과 장미십자단 일에 종사하였으며, 1780년에는 런던의 왈시 사가 생제르망의 바이올린곡을 출판했다.
독일의 에케른푀르데의 교회에는 "소위 생제르망 및 웰돈 백작. 1784년 2월 27일 사망. 3월 2일 매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1710년에 50세로 보이는 생제르망을 보았다는 라모아 제르지 백작부인의 말을 믿으면, 그는 124세 정도에 죽은 셈이 된다.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는 어떤 프리메이슨 모임에 출석하고 있다. 또 한 백작부인은 1821년에 그를 빈에서 만났다고 말했으며, 주 베네치아 프랑스 대사도 그후 산마르코 광장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생제르망의 친구이자 제자인 헤세 카셀의 샤를 왕자는 그의 저서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로 생제르망을 추켜세웠으며, 주브뤼셀 오스트리아 대사인 코벤츨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존경할 수 있는 결백하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 라고 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생제르망을 "이해할 수 없는 남자" 라고 말하였으며, 프랑스의 볼테르는 생제르망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 남자" 라고 평하였다.
생제르맹보다 한 수 더 위인, 혹은 동일인물? 삼천갑자 동방삭
'삼천갑자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은 한자 그대로 '산천갑자', 즉 180,000년을 생존했다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동방삭의 출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BC 156∼BC 87)는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이에 제(齊)나라 사람인 동방삭은 대나무 한 짐에 글을 써서 무제에게 올렸다. 동방삭의 글은 내용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필체도 당당하여 읽는 데 두 달이나 걸렸다.
동방삭은 해학과 변론에 뛰어났고, 속설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장수하였다 하여 ‘삼천갑자 동방삭’이라고 불렀다.
그의 해학과 재치는 언제나 무제를 즐겁게 해주어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때로는 무제의 사치와 부국강병책에 대해 간언하는 등 결코 단순한 익살꾼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만약 동방삭이 이름 그대로 180,000년을 살았다면 그는 무제에게 등용되기 무려 177,800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180,000년을 살고도 죽음을 피해 한반도까지 흘러온 동방삭
용인에서 성남시를 통해 한강으로 유입되는 탄천(炭川)이라는 강이 있다. 한자만으로 보자면 '숯(炭)강(川)'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의 기원은 이렇다.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어 불로장생이 된 동방삭은 인간 수명의 한계를 넘어서서 천지조화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가 된지 오래. 그래서 염라대왕은 이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동방삭을 잡기 위해 저승사자를 보내 동방삭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180,000년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동방삭은 이렇게 자신을 추적하는 저승사자를 피하기 위해 한반도로 숨어든다. 그 이유인즉슨 은신처를 찾아 떠돌던 중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떠도는 것을 들은 것 때문이었다.
이를 풀이하면 '살 곳은 진천이요, 죽을 곳은 용인이라'라는 뜻인데, 꾀가 많은 동방삭은 이 말을 염라대왕과 저승사자도 알고 있으려니 짐작하여 저승사자가 자신을 잡으러 온다해도 '진천'쪽으로 올 것이라고 판단, 용인의 탄천 부근에 숨어있기로 했던 것이다 .
동방삭의 최후의 장소. 용인시 탄천
이러한 동방삭의 잔꾀에도 불구하고 염라대왕은 동방삭이 탄천방면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동방삭을 잡기로 결심하고, 저승사자를 탄천부근으로 보내어 탄천에서 숯(목탄)을 씻고 있도록 명령하였다.
동방삭은 탄천 강변을 거닐며 시조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는데 맑아야 할 탄천 냇물이 시꺼먼 먹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보고는 기이하게 생각하여 상류로 무슨 일이 있는가 올라가보았다. 상류로 올라가니 건장한 청년이 물에 숯을 닦고 있었다.
동방삭은 물었다.
"왜 숯을 물에 씻고 있소?"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숯이 아무리 검다한들 이렇게닦다보면 언젠가는 희게 되지 않겠소?"
이 대답에 동방삭은
"허허 내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씻는 사람을 보기는 당신이 처음일세"
그러자 갑자기 숯을 씻던 젊은이는 저승사자로 변하여 동방삭을 잡아 염라대왕에게 끌고갔다. 동방삭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날 이후 동방삭이 잡혀간 용인의 하천을 숯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을 의역하여 탄천(炭川)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