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魔
―십우도 (둘)
하지만 쓸쓸한 비문(碑文)을 누가 읽고 갈 것인가?
죽음의 음악 멀리서 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온다
누가 오느냐, 누가 걸어오느냐. 내게 산 자는 방문
하지 않는다. 모든 방문자는 죽은 자인 것이다. 죽은
자의 방문은 예정에 없다. 가장 빠른 늦은 방문이거
나 가장 늦은 빠른 방문이다. 낭비한 생이 휴지인가
의심하라, 나는 오히려 구겨진 종이 더미에서 죽은
자의 글자를 해독하려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임을
알았다. 내버려두어라, 산 자는 산 자의 글을 쓰게 하
고 죽은 자는 죽은 자의 글을 쓰게 하라.
그때부터 내가 아는 죽은 자 몇이 찾아와 시를 썼
다, 생전에 쓰려던 시를 아직 못 썼다고. 내가 모르는
죽은 자 몇이 찾아와 시를 썼다, 생전에 쓴 시를 아직
지우지 못했다고. 언젠가 이 시는 써질 것이다, 너무
많은 빗돌을 세웠노라 젊은 날! 젊은 날 죽은 자들은
살아 있다. 그들은 죽어서야 시를 쓰는 것이다. 생은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은 생을 허락하지 않았
으니, 멀리멀리 갔더니 가장 가까이로 왔다.
시를 쓰는 한 별은 빛나리
하지만 쓸쓸한 육체의
비문(碑文)을 누가 읽고 갈 것인가?
그해 여름 그와 나는 먼 지방 도시에 있었다. 그날
밤 누이네 집 옥상 거센 바람 불었다. 먹구름 속에서
별은 무섭게 빛났다, 그와의 대학 시절은 그것밖에
없다. 죽음의 도시 한여름 밤의 기억 옥상에 텐트는
고정되지 않는다! 그의 깡마른 육체는 육체랄 것도
없었다, 각혈하여 허공에 뱉었다. 폐결핵을 숨겼다,
왜 젊음을 숨겨야 했는지 모르지만 묻지 않았다. 그
때 죽음의 도시에서 유령처럼 숨어야 했기에. 죽음의
도시 죽은 자가 신이기에 산 자는 입을 다물라. 다만
홀로 죽음의 도시 노래하던 해쓱한 별.
그해 여름 그와 나는 먼 지방 도시 벌판을 헤매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황량한 벌판 상여도 없이 암매
장당한 벌판 펼쳐지는 그때 바윗돌 보였다. 죽은 자
가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다 일어서지 않은 채 웅
크렸다. 돌상여 한 채 운구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바
위의 집에 누가 사나, 둥근 바위 우리는 문을 두드렸
다. 거기 누구 없소? 대답 없는 바윗돌 언제 꽃 피나,
그때 그 바위 바윗돌 노래로 지어진 줄 몰랐다. 바윗
돌 노래 혼자 중얼거리며 그 바위인 줄 몰랐다. “찬
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
래는 바윗돌“ 바윗돌 벌판에 놓여 있었다. 바위는 언
제 꽃 피나, 죽음의 벌판 우리는 손님으로 와서 바위
를 굴려 캄캄한 세월 앞에 놓는 거였다.
하지만 이 쓸쓸한 비문(碑文)을 누가 읽고 갈 것인
가?
오랜 세월 지난 후 그의 유고 시집 다시나기 펼쳐
든다. 우연히 방문객이 그일 뿐 누군들 상관없다. 나
는 죽은 자가 좋기에 책을 읽는다. 책은 죽은 자의 비
석이다, 검은 글씨 죽은 자의 비문이다. 그의 장례식
은 황량한 벌판에서 치러졌다. 여전히 바윗돌 놓여
있었다. 망자들이 돌상여 떠메고 가려 했다. 바윗돌
꿈적하지 않았다. 나는 바윗돌 천천히 불렀다. 죽은
자가 장례를 치러라, 아직 장례 치르지 않았기에 누
가 죽음의 벌판 떠메고 가랴. 모두 하나의 바위인 것
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구르는 지구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굴리는 바위인 것을. 바윗돌 어디나 널려 있기
에, 하물며 돌상여 많았기에! 우리 놀던 바위 모두
돌상여, 돌상여. 지구의 돌상여라!
더 이상 나는 산 자들을 읽지 않는다, 아직 암매장
벌판은 읽혀지지 않았다! 암매장 벌판 헤매는 건 죽
은 자들이다. 죽은 자의 어깨가 무겁다. 축 처친 육신
의 벌판 산 자에게 나눠주어라. 죽은 자는 죽은 자끼
리 산 자는 산 자끼리 죽음의 벌판 건넌다. 오직 산
자와 죽은 자가 굴리는 바윗돌 불러라! 오직 죽은 자
를 태우고 갈 돌상여 불러라! 아직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다, 나는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의 장례를 기록한 책이 나왔지만 장례를 믿지 않
는다. 그의 직장 동료인 소설가 구효서가 공무도하
가―그는 스물여덟 죽기 전까지 운동권 학생 시절부
터 친구들 옥바라지했고, 성악을 전공한 애인이 있다
는 따위―를 썼기에 오히려 장례는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 곡성이 울렸다, 여전히! 장례 행렬 속에 곡을
하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 목 놓
아 울었다. 폐결핵으로 죽은 애인을 위해 울음을 퍼
다 날랐다, 강물을 끌어다 울진 않았지만 울음은 음
악이었기에 그녀 울음은 마르지 않는다. 여태 누가
울고 울음은 높고 낮은 음이 섞여 바람 속에 퍼져 나
가 강에 울음을 보탠다. 강물은 마르지 않고 다시 그
녀의 울음에 보탠다. 나는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고 믿는다, 영영 공무도하가 장례는 끝나지 않는다.
김영산
하얀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