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채송화씨
아내는 나를 시골집에다 내려놓고 차를 가지고 돌아
갔다.
갑자기, 가야 할 길과
걸어야 할 내 두 발이
흙 위에 가지런히
남는다.
어머니 혼자 사시는 우리집 마당에 발길 닿지 않는 땅
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가만가만 돌아다니며 마당 가
득 발자국을 꾹꾹 찍어본다. 이 마당에서 벌거벗고 뛰어
놀던 내 형제들과 이웃 아이들의 웃음소리 대신 어머니
는 해마다 발 디딜 곳 없이 마당 가득 화려한 채송화를
피워놓는다. 정말 환하다. 달빛은 환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을 죽이고 나무만을 따로따로 달빛 아래 세운다. 달
빛은 모든 것들을 떼어놓고 너희들의 말이 거짓이었음
을 그렇게 보여준다. 물만 흐를 줄 안다.발 밑에서 참
지 못하고 깔깔대는 까만 채송화씨들이 세상을 걷느라
두꺼워진 내 발바닥 깊은 속살에 닿는다. 살아 있는 씨
가 세상의 정곡을 찌른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길들을 거둔다.
세상의 소식이 닿지 않는 이 간단 명료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이 아름다운 현실이다.
이 세상 모든 살 구멍이 열리고 뼈마디가 허물어져내
리는 사랑을 나는 안다. 시를 써야지. 자고 일어나고 밤
먹고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가 꽃이 된다. 칠십 평생 고
된 노동으로 이룬 따뜻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자
고 싶다. 어머니의 깊은 잠만이 나를 새로 깨울 꽃이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깔려 잠을
자던 내가 창호지 문지방에서 꼬물거리는 겨울 벌레 소
리에도
눈을 뜬다.
낡은 내 몸
어디에서
새로
뚫릴
귀와
눈이 있었던가.
나는 깨끗하게 죽을 것이다. 내 죽었다가, 수백번도
더 죽었다가 살아났던 내 청춘의 오래된 이 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겨울 달빛으로 맞아 죽는다. 저 황량한 거리,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모든 거짓 사랑 속에서
미련없이 걸어나와 누구도 닿지 않는 먼 잠을 자리. 저
물소리 끝까지 따라가 잠자는 겨울 채송화씨, 그 끝에서
나는 자고 깨어 그리운 우리집 마당으로 꽃이 아니면
다시 오지 않으리. 꽃이 아니면 나는 나를 이 세상에 허
락하지 않으리
오, 죽지 않고 사는 것은 거짓뿐이니. 너를 따라온 모
든 낡은 길들을 거두어라.
김용택
나무, 창비시선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