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브레로의 잠벌레
나는 다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빗속을 달려
구정물을 튀기며 도시 끝까지 걷기도 하지
훔친 비누를 들고 골목에서 머리를 감는 친구들
밤이 되면 커다란 나무 궤짝에서 술에 취해 잠들고
아침이면 지난밤에 함께 잤던 여자애를 찾느라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지
누구는 구두를 닦으러 나가고
누구는 골목 모퉁이에서 깡통을 신나게 두드려 동
전을 벌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친구들은 대놓고 구걸을 해,
내 말 알아듣죠?
생각할 수 있죠?
우리는 1페소가 필요해요!
당신들은 정색을 하지
이봐, 지금 내게 말하는 거야?!
명심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널 언제까지 참아줄 것 같아,
네 부모도 그렇게는 못 해!
우리가 잘 곳도 없고 떠돌고 굶주렸다고
당신들은 정색을 하지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알고 있는 파올라도
호세도, 로베르토도 아니야
차라리 나를 옛날에 살던 집, 지하 방 애라고 불러줘
처음엔 누구나 순진하고 물정을 몰라
거리를 헤매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고
마리화나를 얻어 피우고 술에 취해 몰려다니다 보면
물건을 훔칠 수도 있고 하수구 옆에서 잠들 수도
있어
누구나 그래!
아니 누구나 그렇진 않겠다
우리는 배우지 못했어
올바르게 주장하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지
밤거리의 불빛을 따라 걷다 보면
교도소에서 나온 형제들 먼 친척들
이웃들과 마주칠 때가 있지만
우리는 큰 모자를 눌러쓰고 서로를 완전히 외면해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라도 하면,
이 호모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엄마가 널 낳았을 때 아버지가 셋이었다며?!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외면하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줘
나는 강도도 아니고
소매치기도, 살인자도 절대 아니야
나는 친구들과 이 골목 저 골목 몰려다니며
늘어지게 한숨 잘 만한 곳을 찾았을 뿐
누군가는 우체국에 다니고
누군가는 은행에 근무하고
또 누군가는 피자를 배달하는 것처럼
거리를 헤매는 게 내 직업이야
만일 누군가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그가 부자든 가난뱅이든 피를 흘릴 때까지 물고 늘
어지지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
형편없는 꼬마들을 많이 다뤄봤어?
한 시간 뒤엔 네 엄마도 먹을 거야!
우리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산체스도
프랑코도, 페르난도도 절대 아니야
차라리 나를 큰 모자의 잠벌레라고 불러줘
그러니까 내가, 뭔가, 크게
세상을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해?
빈털터리 게으름뱅이에 부모 형제도 모르는 천덕꾸
러기라고
당신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이것 봐, 나는 한 번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당신들은 반성을 좋아하지?
당신들의 무릎이 예배당의 마룻바닥을 쿵 소리 나
게 찧고
당신들의 두 귀는 당신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좋아
하지
늙은 여자의 품에 안겨 위로받는 걸 좋아하고
마누라와 아이들의 뽀뽀 세례를 좋아하지
자동차와 연금과 정원이 딸린 주택에 살며
당신들은 거들먹거리길 좋아해
당신들은 그걸 좋아하지
하지만 나는 이름이 없어
나는 매일 아침 아무 데서나 태어나니까
우리가 잘 곳도 없고 떠돌고 굶주렸다고
당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권총을 뽑아 들지
이봐, 카를로스, 네 불쌍한 아비처럼 거리에서 죽
고 싶진 않겠지?
똑바로 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미안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아들도
이웃도, 누군가의 카를로스도 절대 아니야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줘
당신들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 있고
총구는 내가 애지중지하는 큰 모자를 향하고 있어
나는 모자를 벗어들고 거리에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소리치지
자, 쏘고 싶으면 얼마든지 쏴봐!
지금 당장 나를 쏘지 않으면,
당신들에게 똑바로 걸어가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전부 다 얻을 거야
이봐, 어서 결정하라고
언제까지 내가 당신들을 기다려야 해
언제까지 당신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참아줘야 하지?
당신들의 잘난 부모도 그렇게는 못 해!
나는 다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빗속을 달렸어
허기를 잊기 위해 도시 끝까지 걷기도 했지
훔친 비누를 들고 아무 데서나 머리를 감는 친구들
밤이 되면 커다란 나무 궤짝에서 죽은 듯이 잠들고
아침이면 도망친 계집애를 찾느라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기도 했지
누구는 도로에서 자다가 차에 치어 죽고
누구는 경찰에게 쫓기다 총에 맞아 죽고
누명을 쓴 채 줄줄이 소년원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우리는 잘 곳도 없고 떠돌고 굶주린 열세 살,
내 말 알아듣죠?
생각할 수 있죠?
우리는 1페소가 필요했어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