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옆구리를 채울 온기도 없이 서로의 표범이 엇갈린다
마음의 굶주림 속에서, 마음의 넘침 속에서
서로의 실타래 끝에 매달린 쌍둥이처럼, 살인마처럼
나는 산으로 들로 언덕으로 뛰어다니며
양과 염소들을 흩뜨려놓았네
나의 위대한 신이 그렇게 명령했고
나는 그것을 따랐을 뿐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그 알량한 신도 나도
양털을 덮을 수 없어서 추위에 떨어야 했고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를 먹지 못해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 되었다네
벙들어 풀죽은 작은 짐승처럼
태어나서 살며 꿈꾸고 노래하고 끌어안고 신음하다
늙어 죽는다는 사실이 아름다운가
누이들의 끝없는 다툼 속에서 가난하고 불길한 남
자가 되었다
진창에서 태어나 진창으로 사라지는 날까지
무덤 앞을 지날 땐 나뭇가지로 무덤을 들쑤시고
비석에 침을 뱉고 그 위에 올라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가정과 생활 밤 동료들 그리고 수많은 장소들로부터
나는 다만 껍데기에 불과했다고……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말했다
이마 위에 새똥이 떨어지듯
탁자 위의 유리컵을 잠결에 걷어차듯
어느 날 목소리의 주인이 나를 찾았을 때
가정과 생활 밤 동료들과 수많은 장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내가 비로소 그곳에 있다고 확신하였을 때
가정과 생활 밤 동료들 그리고 수많은 장소들로부
터의 목소리는
‘그가 이곳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적이지 않다, 라는 사실만이
나에게 스승이고 부모라는 사적인 사실로부터
나는 한때 식품점의 계산원이었고
카센터의 심부름꾼이었으며
접착제를 마시다 쫓겨난 구두 공장의 어린 공원이
었다
한 번도, 내 책상이란 걸 가져본 적 없고
(누군가의 책상 위에는 항상 수북한 전표와 기름통
가죽 더미와 한 타래의 멍청해 보이는 구두끈이 놓여
있었지)
글을 쓰며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으며
다만 그날그날의 일기처럼
떠오르는 제목 비슷한 것들을 달력에 잡지에 옮겨
적는 일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을 뿐
악보대로
열렬히 드넓은
자유자재의 밤
부인용 장난감
의기양양한 시체
화원의 겁보들
말벌식 표기
볼테르식 안락의자에서
도둑맞은 남색일지
답답한 두 마음
차가워진 옛 동급생
……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말투와 걸음걸이를 관찰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굴려보는 나의 구슬들
이 구슬들로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늙고 병들어 죽어갈 때
이 구슬들이 나에게 어떤 빛과 색을 보여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마시는
식어빠진 커피 맛을 나는 좋아했다
활기찬 인생도 있겠지, 아이스하키 선수들처럼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퍽을 향해 돌진하는 집념의 스틱들
아아아아아아아……
격정과 분노 속에서 감동의 팀워크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티브의 부러진 앞이빨을 찾기 위해
두 시간 반 동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단 한 명의 선수도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동상이 싫어서 나는 광장에 가지를 않았다
수채를 보면 누이들의 뱀 구멍이 떠올랐고
뱀이 무서워 작은 공으로 구멍을 틀어막는
스포츠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구부러진 쇠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단체로 짓밟는 잔디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밤거리를 초조하게 헤매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
기도 했으며
보고 싶다
죽이고 싶다
어서 보고 싶다
어서 죽이고 싶다, 중얼거릴 때마다
접시 위의 푸딩이 떨리듯
저려오는 불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바다가 모두 마르면 해가 일찍 뜰 텐데……’
나는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라는 것도 해보았네
나라는 작은 신을 향해
나라는 거대한 신을 향해
기도하고 파기하고 기도하고 파기하며
나의 유일한 순수가 불탈 지경이네
나의 신은 나의 잿더미를 사랑하지
신이 나를 삼켰든, 배고파…… 하지만
신은 위대할수록 처참한 맛이 나지
잿더미를 무슨 수로 삼킨단 말인가
서로의 실타래 끝에 매달린 쌍둥이처럼, 살인마처럼
마음의 굶주림 속에서, 마음의 넘침 속에서
살며 꿈꾸고 노래하고 끌어안고 신음하다 늙어 죽
는다는 사실이 아름다운가
진창에서 태어나 진창으로 사라지는 날까지
내가 좋아한 건 누이들의 이 가는 소리
내가 사랑한 건 누이들의 이 가는 소리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