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
문청 시절. 흰 도포와 흰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이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네 이름을 장선맘이라고
지으면 대시인이 될 것이다.“ 나는 구름 위에 붕 뜬 채로 잠
에서 깨어나, ‘맘’자에 해당하는 한자가 있는지부터 걱정했
다.(그때는 필명에 반드시 한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옥편을 찾아 펼치니 다행히도 ‘맘’자
가 딱 한자 있었다. ‘굴레 鋄’. 나느 裝善鋄을 필명으로 삼
았다. 그때부터 필명을 무기로 여기저기 시를 투고했지만,
철석같이 믿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날 꾼 꿈이었다. 대시
인의 탄생을 기다렸다. 그러나 고대하던 낭보는 없었다. 돌
팔이 작명가는 지금도 어리숙한 문청들의 꿈에 출몰해 희
귀한 한자로 된 필명을 계시하고 있을까? 어쩌면 글로벌 노
망이 나서 우탕카나 카니륵스키 와우루 점보 같은 국적
불명의 이름을 투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육군 대위가 지어준 이름으로 시인이 되기는 싫었다. 고
심 끝에 새 필명을 지었다. 장정장. 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
어도 이름이 같은 Kafka로부터 착안한 거였다. 이제 내가
두 번째 카프카가 되는 거야! 의기양양 어느 선배에게 새
필명을 말해주었더니, 그 선배는 술집이 떠나가라고 웃었
다. 도저히 웃음을 멈추지 못할 것처럼 웃고 또 웃었다. 기
분이 상해서 두 번째 카프카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이름을
버렸다. 나는 자와 분도기와 콤파스로 시를 쓰는 이지적인
시인인데, 내 필명의 유래가 저토록 발작적인 웃음을 끌어
낸다면, 어떻게 진지하게 취급될 수 있겠는가? 요즘 같았으
면 그냥 K2라고 했을 텐데 참 미련했었다. 필명 짓기에 두
번 실패하고 오기가 생겼다. 나는 더욱 내 멋대로 시를 쓰
자고 결심했다.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을 벗어날 수 없다면
아버지의 문법을 파괴하자고 결심했다.
눈 속의 구조대
장정일, 민음의 시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