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빛
친구가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한 질을 보냈다.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자 작은 독방이 토지로 변했다.
난 그 광활한 토지에 씨앗 대신 나를 뿔이며 장례식을 치
렀다.
대학시절 시인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난
박상륭의 소설『죽음의 한 연구』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연쇄살인 뒤 나무 위에서 자진하는 주인공의 최후를 보며
그 도저한 비장미에 우리는 실성한 것처럼 얼마나 압도되
었던가.
‘한라산 필화사건’ 수배 때도 인터뷰로 여러 번 은밀히 만
났다.
내가 석방되자 ‘시운동’동인들의 ‘이륭 석방환영회’에서
그가 축가로 김영동의 노래「멀리 있는 빛」을 불렀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처연한 노래였다.
깊은 강 같은 노래의 행간이 진짜 노래였다.
29살 그의 눈빛은 심야극장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가만히 눈을 허용하는 것에서 비롯
된다.
그에게 이 세계는 처음부터 폐허였고
산다는 것은 폐허 속의 마지막 잔해를 몇줌 거두는 일이
었다.
모두 장밋빛 꿈의 복선을 적당히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
그는 그런 위선과 기만을 거부했다.
우리 시대의 꿈은 90%가 자본의 덫이다.
이번 기일에는 장밋빛 미래의 덫에 걸린 모든 영혼들을
불러 모아
그 광활한 토지에서 다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
그날의 상주는 ‘입속의 검은 잎’이고 문상객은 잿더미들
이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