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군(群)*
「첫번째_소년군(少年群)」
■국경지대
날카로운 쇳조각들을 바닥에 깔았고 전깃줄로 경계선
을 그었으며,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흘려보내고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변형함.
■매직 아일랜드의 누에고치들
그 소년족(族)들은 모두 헬멧을 쓰고 다니며, 톱과 망
치를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그 소년족들이
행진할 때면 톱과 망치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소년족들의 생김새는 광대뼈가 과속방지턱처럼 툭, 도드
라져 있고 작고 찢어진 눈에 코는 납작하다. 그 소년족들
은 한 소년이 죽으면 스스로 자기 뺨을 칼로 상처 내서 피
를 흘리며 곡을 하고 철천지원수를 절대 잊지 않는다. 그
소년족들은 젖니로 다른 소년족들의 하얀 목덜미를 물어
뜯어 죽이기를 좋아한다.
■어드밴처의 누에고치들
이 소년족(族)들은 모두 빨간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한
손에는 차갑고 무거운 쇠파이프를, 호주머니 속에는 다
목적 주머니칼을 항상 넣고 다닌다. 이 소년족들의 생김
새는 얼굴은 창백하리만치 눈처럼 하얗고 눈썹과 머리카
락은 모두 밀어서 스킨헤드다. 이 소년족들은 한 소년이
죽으면 화장한 후 유골을 추려내어 니스 칠을 한 다음 반
짝거리는 뼈들을 화폐로 사용한다.
1-1
이곳을,
우리들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어른들의 손을 잡고 걸어다녔다.
한 손에는 은빛 알루미늄 풍선을 들고 다녔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어른들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낮은 구름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흘려주었다.
1-2
유리 돔 위로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유리 돔 안에 하얀 연기가 자욱했다.
퍼레이드 맨 앞에 섰던 금발 무희의 입이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어른들의 손목은 죽은 새처럼
우리들의 어깨를 툭, 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안개가 걷혔을 때
우리들만이 이곳에 서 있었다.
어른들은 모두 바닥에 누워 있었다.
1-3
키가 큰 어른들은 모두 죽었다.
우리들은 어른들의 시체를 아이스링크에 한데 모아버
렸다.
소년들은 어른들의 시체를 불태웠다.
우리들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소녀들은 바닥에 귀를 대고 얼음 녹는 소리를 들었다.
1-4
우리들 중 여럿은 이곳을 떠났고
우리들 중 여럿은 그곳에 남았다.
패스트푸드점 안에 햄버거는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조금씩 아껴 먹었다.
이곳과 그곳을 연결하는 국경엔
날카로운 쇳조각들을 바닥에 깔았다.
전깃줄로 경계선을 만들었고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흘려보냈다.
1-5
공기가 차가워지면,
우리는 동물 마스코트 옷을 입고 다녔다.
양 머리, 소 머리, 염소 머리를 뒤집어쓴 채 걸어다녔다.
1-6
우리 중 하나가
고개를 쳐들고 눈부시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가
우리 중 하나의
머리통에 그대로 꽂혔다.
유리 돔 일부분이 깨져나갔다.
1-7
밤이 오면,
유리 돔은 할로겐전구처럼 불을 밝힌다.
1-8
간혹,
먼 곳에서 그 불빛을 보고 소년, 소녀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에게 햄버거를 주고 끓인 우유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심심할 때면,
우리는 그들을 회전목마 위에 밧줄로 꽁꽁 묶어놓고
며칠 동안 목마를 돌렸다.
죽을 때까지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1-9
녹슨 놀이기구 앞에는 종이 소년이 서 있다.
우리는 그 종이 소년보다 키가 자라면
이곳을 떠나거나
아니면,
자살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1-10
키가 자라버린
우리 중 하나가 이곳을 떠날 때면
우리는 야유했고 발을 걸어 넘어뜨렸고 돌을 던졌다.
키가 자라버린
우리 중 하나가 자살을 택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자살을 도왔다.
1-11
시체는 마찬가지로 아이스링크에 불태웠다.
이제 바닥엔 얼음은 없고 딱딱한 시멘트 위 검은 재뿐이
었다.
1-12
우리 중 하나가
지하 환풍구 속에 유방이 나온 소녀를 숨겨주었다.
우리 중 하나는 매일 밤 그 환풍구 속으로 기어들어가,
소녀의 유방을 빨고 만지며 잠들었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 중 하나의 머리를 밤새
쓰다듬어주었다.
1-13
소녀는 환풍구 안에서
날이 갈수록 뚱뚱하게 살이 쪘다.
소녀가 환풍구 안에서 꼼짝달싹 못할 지경이 되자,
소녀를 숨겨줬던 우리 중 하나가
소녀가 숨은 곳을
우리에게 귀띔해주었다.
1-14
우리는 소녀를 환풍구 밖으로 끌어냈다.
뚱뚱한 그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훌쩍 울었다.
늘어진 더럽고 낡은 티셔츠 밖으로 물컹,
유방 한쪽이 삐져나왔다.
1-15
우리는 소녀를 국경까지 질질 끌고 갔다.
우리 중 여럿이
바닥에 누워 몸부림치는
소녀의 달와 팔을 붙잡고
몇 번 흔들다가
전선 너머로 던져버렸다.
1-16
전선에 한쪽 발이 걸린 채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소녀를 향하여
톱과 망치 부딪치는 소리들이 몰려들었다.
1-17
이제 몇 번의 겨울과 여름이 지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1-18
모든 놀이기구는 녹이 슬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1-19
밤이 와도,
유리 돔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더이상 먼 곳에서 찾아오는 소년, 소녀들은 없었다.
1-20
지하의 발전기도 멈췄다. 국경의 전선에 더이상 전기가
흐르지 않았다.
1-21
그러나
이곳도 저곳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전선을 넘나들지 않
았다.
1-22
우리는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굶주렸고, 병
들어 있었다.
1-23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입을 벌리고 쪼그
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1-24
어느 날 깨진 유리 돔 틈 사이로, 툭툭 밧줄들이 떨어졌다.
1-25
그들은 밧줄을 타고 우리 쪽을 향하여 스르르 내려왔다.
1-26
검은 복면을 쓰고 한쪽 어깨에 소총을 메고 있었다.
1-27
그들은 우리보다, 키가 한참 컸다.
방독면
조인호, 문학동네시인선 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