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_기뢰군(機雷群)」
3-1
소년의,
의식의 흐름 끝에서 증기선은 오는 것이다
3-2
무뚝뚝한 관념처럼 철갑 판을 두르고
옆구리에 달린 외륜(外輪)을 천천히 돌리며
굴뚝 위로 이상한 연기의 형상을 뱉어내는
움직이는 안개 같은 증기선을
3-3
삽을 든 털북숭이 원숭이* 화부가
보일러 속에 한 삽, 한 삽 퍼나르는
어두운 석탄들의 질과 양에 의해
굴뚝 위 연기는 어느 바람의 형상을
흉내 내며 어질어질 변하였던가
3-4
이제는 원숭이 두개골을 닮은 소년에게
야만을 물어야 할 때임을 나는 깨닫는다
소년이여, 두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채
다만 고요한 두개골처럼 캄캄히 눈 감으라
두 개의 텅 빈 구멍 속에 차오르는
상이군인들의 불굴의 군가를 들으리라
3-5
그것이 다만 끔직한 해골이라는 것을
모르는 척,
어머니는 너의 얼굴뼈를 더듬었다
무심히 얼굴을 감싸 쥔 소년이여
이제는 그 야만을 더듬어 기억해야 하리
불그스레 홍역꽃을 앓던 소년이여
뜨거운 이마뼈를 어루만지던 손을 기억하듯
숨 쉬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등을 떠밀던 그 손도 기억해야 하리
3-6
그리고 소년은 가족과 헤어졌다
모퉁이를 돌자 휘황찬란한 항구의 밤이었다
공중에서, 크레인 갈고리가
소년들을 하나둘 지상으로부터
번쩍번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 유진 오닐,『털북숭이 원숭이 The Hairy Ape』.
3-7
소년은 위험한 항구의 공기를 호흡하며
절름발이처럼 뒤쫓아온 그림자를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뜨리고 소년이여,
얼굴을 짓뭉개며 핏덩이가 될 때까지
두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질질 침과 피로 범벅이 된 채
헤, 하고 웃는 얼굴을 짓뭉개며
핏덩이가 될 때까지
두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한 절름발이 소년이 바닥에 누워
얼굴을 감싸 쥐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이 다만 끔찍한 해골이라는 듯
3-8
멀리, 항구의 불빛은 횃불처럼 흔들린다
부부 기적 소리가 울리고 굴뚝 위로
이상한 연기의 형상이 공중에서 흩어진다
우리는 갑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나는 앞니가 부러지고 광대뼈가 일그러졌지.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나는 왼쪽 고막이 터지고 이마가 움푹 파였지.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나는 무릎이 펴지지 않고 엉덩이 한 짝이 없지.
히이힝……
우리 중 하나가 당나귀 흉내를 낸다
킥킥킥……
우리 중 하나가 키득거린다
이제, 항구의 불빛은 별빛 중 하나가 된다
갑판 아래
기관실 보일러 속으로 석탄을 퍼나르는
삽을 든 털북숭이 원숭이 사내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우람한 등에 땀방울이 맺힌다
근육이 파도처럼 뒤틀린다
보일러는 온통 붉고 뜨겁다
굴뚝 위
부부 기적 소리가 또 한 번 울린다
3-9
얼마나 지났을까
흩뿌려진 물고기 알처럼 눈 내린다
갑판에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앉아
우리는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내민 채
눈송이를 날름날름 받아먹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중 하나가
얼어붙어 툭, 쓰러지면 우리는 몰려들었다
소년의 불룩한 하얀 배를 까집으리라
우리 중 하나가
녹슨 면도날로 배를 가르면
우리 중 하나가
삶은 빨랫감을 건져올리듯
우리 중 여럿이
심장과 대장과 쓸개와 위를 끄집어내리라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이럴 수가, 이 녀석은 당근도 먹을 줄 아는군.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희귀하군, 이 녀석은 심장이 오른쪽에 있었어.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재미없어, 이 녀석의 뇌를 한번 보고 싶었는데.
우우우……
우리 중 하나가 좀비 흉내를 낸다
히히히……
우리 중 하나가 히득거린다
이제, 항구의 불빛은 별자리 중 하나가 된다
갑판 아래
기관실 보일러 속으로 석탄을 퍼나르는
삽을 든 털북숭이 원숭이 사내의
움직임이 멈춘다
석탄 더미에 걸터앉아 더러운 천으로
얼굴의 검댕을 문지르고
축축한 겨드랑이를 닦는다
보일러는 온통 붉고 뜨겁다
굴뚝 위
부부 기적 소리가 또 한 번 울린다
3-10
얼마나 지났을까
갑판 난간 아래로
둥실둥실 기뢰군이 바다 위를
부유하며 스쳐지나갔다
우리 중
가장 두개골을 닮은 듯
야위어 있는 하나를 골라 바다에 내던지리라
그러면,
우리 중 하나는
파도에 휩쓸려 발버둥치다가
기뢰를 하나씩 붙잡으리라
그러면,
우리 중 여럿이
기다란 장대를 들고 갑판 난간에 서 있다가
기뢰에 의지한 채
허우적거리며 선체로 떠밀려오는
우리 중 하나를
멀찌감치 밀어내리라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발버둥치는, 저 녀석은 뿔 달린 기뢰보다도 못생겼군.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허우적대는, 저 녀석은 천식을 앓고 있지 않았어?
우리 중 하나가 말한다
―저것 봐라, 저 녀석은 기뢰 대신 장대에 매달리려 하네.
컹컹컹……
우리 중 하나가 물개 울음소리 흉내를 낸다
크크크……
우리 중 하나가 크큭거린다
이제, 항구의 불빛은 별똥이 되어 떨어진다
갑판 아래
기관실 보일러 속으로 석탄을 퍼나르던
삽을 든 털북숭이 원숭이 사내가
석탄 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
보일러는 온통 붉고 차갑다
굴뚝 위
부부 기적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3-11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빛이 밝아온다
죽은 소년이 얼굴을 감싸 쥐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빛,
3-12
그것이 다만 끔찍한 해골이라는 듯
갑판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3-13
시나브로,
증기선은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방독면
조인호, 문학동네시인선 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