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시인훈련소(最終兵器詩人訓鍊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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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홍당무 앞에 선 당나귀 같은 마음으로 비밀 이야기
를 시작하고 싶다.
사실 나는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서 시 창작훈련을 받는 훈
련병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 소속된 훈련병들은 모두 다
시인들이다. 그들과 나는 인간이 만든 최종병기가 ‘시인’이
어야 한다는 사실에 뜻을 같이한다. 지상의 모든 강철무기
들과 생화학무기 그리고 절대적인 핵무기를 초월하기 위하
여, 우리 훈련병들은 하루하루 강도 높은 훈련을 견뎌내고
있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 제1조항을 살펴보면 ‘시인은 인간
최후의 병기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자
면, 우리 최종병기시인훈련소의 병기고 안에는 탄약과 포탄
대신 시집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를 창립한 사람은 훈련단장이다. 그는
해병대 훈련병 시절, 직접 몸으로 겪은 해병대를 벤치마킹
하여 지금의 최종병기시인훈련소를 설립했다. 우리 최종병
기시인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최종병기시인으로 다시 태어나
는 그날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
신을 단련하는 중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 기상 나팔이 울
리면, 연병장에 모인 우리 훈련병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전
방을 향해 외친다.
“무기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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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시인훈련소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표어가 붉은 바
탕색에 노랑 글씨로 커다랗게 씌어 있다.
인간개조의 용광로 최종병기시인훈련소
바로, 저렇게 씌어 있다.
이 표어를 처음 본 보통 사람이라면 용광로처럼 얼굴이
낯뜨거워질 수 있다. 무언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최종병기시인
훈련소의 표어는 담뱃갑 속의 경고문구처럼 정치적이지도
않고, 광고 카피처럼 은밀하지도 않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
의 표어를 편견 없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바라보자. 어린
아이 얼굴처럼 얼마나 순수한 비유인가. 매일 아침 훈련병
들은 이 표어를 바라보며 기교 없는 정직한 비유를 배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 들어서면 우선 “악”이라는 개 짖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올 것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
서는 “악” 외에 다른 말은 없다. 그곳에서는 “네”도“악”,
“사랑해요”도 “악”, “배고파요”도 “악”이다. 한마디로, “악”한
마디로 모든 의사소통을 꿈꾸는 시인공화국이다. “악”을 반복
해서 듣고 말하다보면, 그 소리의 역사와 전통을 깨닫게 된다.
악을 외칠 때 인간의 퇴화중인 턱 근육은 비로소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우리는 우리가 수백만 년 전에 잃어버렸던 야
생의 언어를 마침내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서는 기초체력훈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동 트기 전에 기상한 시인들은 방독면을 뒤집어
쓴 채 아침 구보를 시작한다. 꽃병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 쉬기 힘든 방독면이지만, 우리 최종병기시인훈련소 훈련
병들에게 방독면이란,
신선한 핀란드산(産) 자작나무 숲속 바람 같은
산소마스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방독면 구보가 끝나면, 연병장에 모인 훈련병들은 1미터
가량 되는 거대한 만년필을 들고 소총 16개 동작과 총검술
을 실시한다. ‘펜은 무기다’라는 말을 실감하려면, 역시 펜
을 무기처럼 사용해봐야 한다는 사실을 최종병기시인훈련소
의 훈련병들은 잘 알고 있다. 아침으로는 삶은 달걀 흰자와
닭 가슴살을, 식후엔 우유에 단백질 보충제 메가맥스를 타
마신다. 체력은 곧 ‘시힘’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군할 때 훈
련병들의 완전무장 속에는 언제나 ‘세계문학전집 전 100세
트 양장본’이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 훈련병들은 책이
지닌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기 위해 절대 요령을 피우
지 않는다. 최종병기시인이 되기 위한 길은 책의 길이며 그
책의 길을 “악”이라는 외마디로 묵묵히 걸어가고자, 오늘도
훈령병들은 완전무장 행군을 한다.
*
최종병기시인훈련소의 화생방훈련은 혹독하기로 유명하
다. 화생방훈련장에 투입된 훈련병들은 몸속에 물이란 물
은 모두, 눈과 코와 입으로 펑펑 쏟아져나오는 ‘대홍수의 참
사’를 겪게 된다. 화생방훈련장에서 질질 기어나오는 순간,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비틀어 짜낸 걸레 같은 기분이 들 때
정말로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시집이
화생방훈련장 같아야지만 시인은 ‘최종병기시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최종병기시인이 되는 데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는 위장술
이다. 뛰어난 저격수가 되려면 사물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잠입할 줄 알아야 한다. 최종병기시인은 사물의 편에 있다.
이를테면 훈련교관이 매미! 하면, 나무에 매달려 맴맴 울어
대는 우리 훈련병들. 그 순간 자신이 매미라는 사실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어떤 훈련병은 땅속에서 7년 동안 매미 유
충으로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 최종병기시인은 인간이란
허물을 언제든 탈피할 수 있어야 하므로 살아 있는 유령이
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최종병기시인의 초월대상 목표는 바로 핵이다. 핵폭발로
피어나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최종병기시인은 ‘웃음버섯’으
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웃음버섯’이란 환각버섯의 일종으로 먹으면 신경을 자극
하여 웃음이 나오는 증상이 나타난다. 위험성은 없다. 신경
계통에 작용하므로 이상한 흥분 상태가 되어 기분이 좋아지
고 웃고 노래하는 등 약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뿐이다. 생
명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고 하루쯤 지나면 완전히 회복되며
그밖에 다른 부작용이 없으므로 무서운 독버섯은 아니다.
웃음은 어떤 ‘핵’을 건드리기만 하면 정신없이 터져나오
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핵을 잘못 건드리면, 세상은 일순
간 정지되므로 조심하도록 하자. 이를테면 아래의 리틀보
이처럼 말이다.
핵폭탄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되기 직전, 히로시마의 하
늘은 유난히 맑았고 여느 때처럼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여
름날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리틀보이’의 뇌관이 딸각, 움직
이던 찰나! 정확히 핵이 폭발한 그 시각에 시침과 초침 그리고 사
람들, 히로시마의 모든 것들이 다 멈췄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 훈련병들이 위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선, 겨드랑이 속에서 간질간질 피어나는 ‘웃음
버섯’을 재배할 수 있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웃음버섯’이
야말로 진정한 핵우산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무기다.
우리 최종병기시인훈련소의 훈련병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말이 있다.
‘바야흐로 철의 시대는 지나갔다’라는 말이다. 훈련병들
은 병기유(油)로 무기를 닦지 않는다. 무기를 닦기 위해 기
름이 나는 땅을 폭격하는 비생산적인 일을 우리는 하지 않
는다. 대신 우리는 총에 물을 준다.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
구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장미,를 위해 우리는 매일 밤
총구 속에 졸졸졸 물을 주고 잠자리에 든다. 돌에 푸른 이끼
가 달라붙는다면 철에는 붉은 녹이 달라붙는다. 붉은 녹은
철을 부식시키고 마침내 붉은 장미로 피어난다. 불법무기자
진신고제 날, 준법의식이 투철했던 한 훈련병은 장미 한 다
발을 품에 안고 경찰서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공무집행
방해죄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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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최종병기시인훈련소의 시인들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최종
병기시인훈련소에서 시인을 죽일 수 없는 훈련은 시인을 더
욱 강하게 만든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서는 오직 강한 시
인만이 살아남는다.
개가 두 마리 모이면 호랑이도 물어 죽인다.
<최종병기시인의 긍지>
나는 최종병기시인훈련소의 일원으로써 선봉군임을
자랑한다.
하나. 나는 찬란한 최종병기시인정신을 이어받은
무적시인이다.
둘. 나는 불가능을 모르는 전천후 시인이다.
셋. 나는 책임을 완수하는 충성스런 시인이다.
넷. 나는 독자에게 신뢰받는 정예 시인이다.
다섯. 나는 한 번 시인이면 영원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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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일지, 2005년 6월 19일, 41쪽]
최전방감시초소(最前方監視哨所)에 땅거미가 진다.―불가사
리, 그것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땅 끝을 기어가고 있었다.―이윽
고 밤이 깊어진다. 나는 당직완장을 한쪽 팔에 차고 근무자를 깨
우러 간다. 불 꺼진 내무실에서 소대원들이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입을 벌린 채 조용히 잠들어 있다. 나는 건전지가 다 닳아가는 손
전등을 꺼낸다. 구석진 곳을 비추자, 한 그림자가 침상 위에 앉아
있다. 나는 천천히 그림자를 비춘다. 손전등이 깜빡깜빡 그림자
를 비출 때마다
그는
소총에 비스듬히 기댄 채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다.
어디선가, 캄캄한 지하수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독면
조인호, 문학동네시인선 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