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 (부- 실패의 성자(11))
당나귀와 아내
저녁에는 젊은 시절부터 줄곧 함께 지내온 늙은 당
나귀 한 마리를 때려죽였다네. 이유인 즉슨, 그 망할
녀석이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지. 내
몸은 아직 청년처럼 힘이 넘쳐 십 리를 더 갈라치면,
녀석은 나를 노인네 취급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꼼짝
도 하지 않았고, 내가 새로운 돈벌이를 생각해내면,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며 콧방귀를 뀌
지 않았겠나.
나는 말일세, 죽은 녀석의 몸을 보기 좋게 토막 내
어 부대 자루에 옮겨 담았다네. 미운 정이 깊어 가슴
이 짠하기도 했지만 속은 더할 나위 없이 후련했다네.
그날 밤 나는 술을 진탕 마신 뒤 모처럼 홀가분하 마
음으로 잠이 들었고, 꿈에서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가서 먹고 마시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네.
그리고 이튿날 잠에서 깨어 죽은 당나귀의 토막이 들
어 있는 부대 자루를 보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
기도 하더군, 죄책감 같은 건 없ᄋᅠᆻ고.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밭일을 하고 창고를 정리
하고 젊은 시절 곁눈질로 배웠던 붓글씨도 쓰며 한가
로운 시간을 보냈다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나
는 왠지 모르게 따듯한 피냄새가 그리워 부대 자루를
이부자리 곁에 두고 잠을 청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피냄새는 나지 않고 어디선가 잠을 청하기 좋은 방울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거나하게 취해 친구들과 소
풍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 마을이 가까웠을 즈음,
언덕 위에 웬 당나귀 한 마리가 주인도 없이 홀로 서
있질 않겠나.
그때 곁에 있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네.
“이보게 친구, 자네의 당나귀가 마중을 나왔군그래”
친구의 말을 듣고 자세히 올려다보니 내가 기르던
당나귀가 틀림없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네. 죽은 녀석이 그곳에 멀쩡히 서 있으니 말일세.
곁에 있던 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네.
“그래도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일세, 안아주고 싶
거든 어서 가서 안아주게나”
나는 꿈속에서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지만, 언덕 위로 성큼 다려가 당나귀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네. 오랜 세월, 어디를 가
든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함께였던 그 녀석에게 처
음으로 심한 죄책감을 느꼈던 걸세.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꿈에서 깨어났고, 마음을 진
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잠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네.
그런데 잠들기 전에 들려왔던 방울 소리가 여전히 들
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죽은 당나귀가 글쎄 머리맡에
앉아 서러운 듯 눈물을 떨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
는 반가운 마음에 녀석을 불러보려 했으나 입술이 떨
어지지 않았다네. 녀석의 등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두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이승에서
의 마지막 꿈에서 깨어나야 했네. 흰 수염의 장의사
가 방으로 들어와 내 목에 감긴 밧줄을 풀었네. 방 한
편에는 검은 부대 자루가 놓여 있었는데, 그 속
엔 당나귀 대신 늙은 아내의 토막난 시체가 담겨 있
었다네. 마당에선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여전히 나지막한 방울 소리가 어디선가 들
려왔는데, 그 소리는 참으로 다정해서 깊은 잠을 청
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리였다네.
육체쇼와 전집
황병승, 문학과지성 시인선 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