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에서 태어난 리버힐 소프트는 죽을 때 두 명의 자식을 잉태했다. 하나는 레벨 파이브, 또 하나는 CING. 이 둘의 운명은 서로 대조적이어서 매우 극적이었다. 레벨 파이브는 RPG 위주의 타이틀과 대중 친화적인 미디어 믹스 전략으로 급격히 세를 불러나가며 일본 굴지의 게임 회사로 성장했다. 그들은 시류를 읽을 줄 알았고 그렇기에 승자가 되었다.
반대로 CING은 레벨 파이브랑 달리 정통파 어드벤처 게임을 주력으로 하던 회사였다. 오버 블러드 제작진이 독립했던 레벨 파이브와 달리 CING의 주축은 J.B. 해롤드 시리즈와 호박색 유언 같은 추리 어드벤처를 제작한 미야가와 타쿠야가 중심이 되었던 회사였다.
21세기는 어드벤처를 사랑하는 그들에게 별로 호의적인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출발은 꽤 괜찮았다. PS2로 발매된 데뷔작 유리의 장미는 캡콤이 지원하고 쟈니즈 아이돌 TOKIO의 마츠오카 마사히로와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한 신키로를 기용한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호러 어드벤처였다. 하지만 야심차게 출발한 이 게임은 미적지근한 반응과 함께 거의 잊히고 말았다.
그 뒤로 CING은 캡콤과 소니를 떠나 닌텐도의 지원을 받으며 게임을 만들게 되는데, 오히려 이 시절 게임들은 유리의 장미 시절보다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어나더 코드를 시작해 국내에도 정식 한글판으로 발매된 호텔 더스크의 비밀을 발매하면서 해외에서도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여러모로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와 더불어 일본 추리 어드벤처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달까.
하지만 CING의 이런 조용하지만 착실한 행보는 2010년 라스트 윈도우를 발매한 이후, 갑작스럽게 끝나고 만다. Wii로 내놨던 야심작 SRPG 임금님 이야기 개발이 지나치게 길어지면서 회사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고, 호평과 달리 악화된 재정을 회복하지 못한 채 쇠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CING의 파산은 발표 기간이 뜸해져가는 탐정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와 악전고투하고 있는 춘소프트 사운드 노벨과 더불어 일본 게임 업계에서도 어드벤처 게임의 자리가 좁아져간다는 냉엄한 현실을 증명하는 씁쓸한 사례로도 남게 되었다.
그렇게 라스트 윈도우 정식 발매도 물 건너 간 채,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16년 봄, 블레이블루로 유명한 아크 시스템 웍스에서 호텔 더스크의 비밀의 제작에 참여했던 제작진을 끌어모아 3DS용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5월 초 'CHASE 미해결사건 수사과 ~먼 기억~ (이하 먼 기억)'이라는 제목의 3DS용 다운로드 게임이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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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즐근해 보이는 일본인 카일 하이드 mk.2와 좀 더 딱 부러지는 일본인 레이첼 mk.2가 이번 작품의 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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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전화가, 당신의 모든 걸 바꾸었다.”" |
배경은 현대 일본. 도쿄 제3경시청 미해결사건 수사과는 표면적으로는 미제 사건을 수사하는 부서이나, 실상 할 일이 없기에 한직으로 취급받는 곳이었다. 이 부서 소속의 아마쿠라 코토는 엘리트 경관이라는 자부심과 달리 한직 취급받는 자신의 처지와 더불어 퉁명스러운 괴짜 상사 나나세 쇼노스케 때문에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무료한 하루를 보내던 코토는 '5년 전 일어난 병원 화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다.'라는 괴전화를 받게 된다.
먼 기억은 시작부터 하드보일드 누아르 장르 어법을 차용하고 있다는 걸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일견 단순하게 보였던 사건이 점점 복잡하게 엉키면서 주인공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서사적 구조나 상처받은 사람들, 아이러니와 씁쓸함으로 가득한 '진상'은 분명 하드보일드나 누아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중후한 맛을 제공하고 있다.
캐릭터 조형 역시 하드보일드의 정석에 충실하다. 담배를 뻑뻑 피우며 턱수염과 후즐근한 눈주름을 감추지 않는 형사 나나세 쇼노스케는 일본식 87 분서에 일하는 필립 말로처럼 보이며(직접적으로는 일본 형사 드라마 MOZU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맡은 쿠라키 나오타케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그와 대조되는, 단정하고 반듯한 여성 파트너 아마쿠라 코토는 하드보일드 탐정을 보좌하는 조수 캐릭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외 먼 기억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피해자, 비밀을 감추고 있는 신비로운 여성, 입이 거친 범죄자 등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영화를 접했다면 친숙할 유형의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다만 먼 기억은 트래비스 맥기나 필립 말로의 오마주에 가까웠던 카일 하이드 시리즈랑 달리, 87 분서 같은 정통적인 형사 추리물에 가깝다. CING의 전작 중에서는 AGAIN에 가깝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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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G 게임, 특히 카일 하이드 시리즈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반가울 부분들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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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점들을 음미하기엔 게임이 너무 짧다. |
단순히 장르 규칙에 충실해서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CING 시절 만들었던 어나더 코드나 카일 하이드 시리즈에서 꾸준히 구축해 온 미적 세계관을 빌려오면서 생긴 친숙함도 있다. 이는 CING 시절부터 참여한 카네자키 타이스케의 캐릭터 디자인의 공도 크지만(쇼노스케에게 카일을 떠올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새로이 참여한 각본 담당 사쿠라 마유를 위시한 제작진들 역시 호텔 더스크의 비밀과 라스트 윈도우를 다분히 의식하면서 전체적인 틀을 구축하고 있다.
어나더 코드 시리즈나 호텔 더스크의 비밀이나 라스트 윈도우가 팬을 끌어 모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라고 물어보면 아마 섬세하게 직조된 감성이 아닐까라고 대답하고 싶다. 호텔 더스크의 비밀과 라스트 윈도우를 살펴보자. 카일 하이드는 그 자체로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캐릭터였지만, 그의 눈에 비친 캐릭터들에게서는 세월의 더께와 내면의 상처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인물들은 미래로 나아가고 싶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있었고, 그렇기에 멜로 드라마적인 물기가 장르적인 캐릭터를 축축하게 만들고 있었다. 카일 하이드는 그들과 대면하면서 과거의 진상을 밝히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로 작용한다. 이런 다소 우울한 물기에 젖어 있으면서도 따뜻한 감성이야말로 CING의 장기였다.
사실 먼 기억의 본편 전개 역시 그렇게 특출나다고 할 수 없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반전 자체는 중심이 되는 특정 인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며 전개 역시 그렇게 튀는 편은 아니다. 먼 기억의 장점은 전개의 새로움이 아니라 전개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이다.
먼 기억는 상술한 CING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잘 이어가는 편이다. 본의 아니게 친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살아가던 청년 유토가 미해결사건 수사단원들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이라던가 반전을 통해 밝혀지는 아이러니, 진범의 심경 고백 등에서 사람들이 CING 게임에 빠져들었던 매력을 잘 드러낸다. CING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라면 차례차례 밝혀지는 진상과 마무리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장점들과 달리 먼 기억의 뒷맛은 그렇게 개운하지 않다. 제작진들이 후속작 발표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있지만 먼 기억은 기본적으로 '파일럿 에피소드'에 가깝다. 게임 자체는 설렁설렁 해도 3시간이면 클리어 가능하며 우선 큰 줄기가 되는 사건 자체는 해결되었지만 결말은 대놓고 후속작을 암시하는 클리프 행어다. 유토랑 쇼노스케, 코토 이 세 사람이 관계 역시 겨우 궤도에 올랐을 뿐이다. 때문에 먼 기억은 텍스트를 읽는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끝나버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하드보일드 추리물이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먼 기억은 안락의자 탐정물에 가까운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예산 부족인지 등장하는 장소가 사무실과 취조실 밖에 없다. 시간 변화나 공간 연출도 다소 단조롭게 이뤄지는 편이다. 때문에 장르적 쾌감을 느끼기엔 꽤 갑갑한 부분이 있다. 차라리 발매 전 후속작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면 이런 갑갑함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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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S를 이용한 입체 퍼즐 같은 게 하나 정도 있었다면 파일럿 에피소드로써 좀 더 후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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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게임 내내 “저에게 시간과 예산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라는 제작진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아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
게임 디자인 면에서는 유감스럽게도 CING 시절보다 퇴보한 편이다. 호텔 더스크의 비밀이나 라스트 윈도우는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NDS라는 기기를 제대로 이해한 퍼즐을 선보였으며 그게 또 다른 세일링 포인트였다. 특히 호텔 더스크의 비밀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퍼즐 디자인은 허를 찌르는 독특함이 살아 있었다. 적어도 CING의 제작진들은 자신이 만드는 매체를 잘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먼 기억은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는지 듀얼 스크린을 이용한 전신 샷 연출을 제외하면 CING 특유의 독특한 터치들이 확 줄어버렸다. 기본적으로 먼 기억은 사진 증거에서 중요한 증거를 터치로 찾아내야 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일본식 일자형 커맨드 선택 어드벤처인데, 디자인이 그렇게 새로운 것도 아닌데다 뜬금없이 불합리한 허들을 설정해놓아 당혹스러움을 안겨줄 때도 있다. 게다가 커맨드 선택 난이도도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닌데다 세이브를 아무 때나 할 수 있기에 왠지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로토스코핑으로 인물 그래픽을 구현했던 카일 하이드 시리즈랑 달리, 먼 기억은 Live2D라는 2D 원화를 3D 모델링으로 컨버전하는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인물 그래픽을 구현하고 있다. Live2D 자체는 완성도가 준수한 편이다. 섬세한 뉘앙스라던가 감정 표현을 위해 들인 공이 헛되지 않았다고 할까. 로토스코핑으로 재현된 특유의 아날로그한 맛은 사라졌지만 제한된 예산에서는 괜찮게 뽑아낸 편이다. 다만 모델링이나 표정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에 갑갑함을 느낄 가능성도 크다.
반대로 게임 사운드는 좋은 편이다. 호텔 더스크의 비밀에서 이어졌던 재즈 풍의 사운드트랙이 적시적소에 삽입되어, 등장 인물들의 감정적 피치를 적절히 잡아주는 연출이 돋보인다. 게임 내 사운드트랙 다시 듣기 메뉴가 없다는 아쉬울 정도다.
먼 기억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유일하게 용인할 수 있게 하는 미덕은 800엔 정도의 저렴한 가격과 CING 특유의 미적 감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게임이 SIMPLE 시리즈랑 다를 게 뭔가…… 라고 따진다면 딱히 제작자들을 옹호할 논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먼 기억은 그 점에서 앞으로 이어질 후속작들이 절실한 미완의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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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정도로 쓸쓸한 감수성의 단편 추리 소설 한 편 접하고 싶다면 800엔은 괜찮은 가격일지도 모른다. ...후속작이 나올 때 얘기지만. |
이 리뷰에서 필립 말로, 트래비스 맥기, 87분서가 등장한다는 점 만으로도 리뷰어가 얼마나 고전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이름들을 봐서 좋았습니다.
호텔 더스크의 비밀 무섭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했는데..
제가 본 바로는 거의 모든 하드보일드 탐정은 필립 말로의 오마주이거나, 변형이거나, 안티테제이거나 합니다.
난 호텔더스크 보단.. 역전재판이 더 재밌더랑... 호텔더스크는 뭐랄까 좀 지루함
레이먼드 챈들러요.
호텔 더스크의 비밀 무섭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했는데..
난 호텔더스크 보단.. 역전재판이 더 재밌더랑... 호텔더스크는 뭐랄까 좀 지루함
이것도 결국 일본판 3DS를 갖고 있어야 다운 및 결제, 플레이가 가능한 거군요.... 리뷰는 좋지만요
이 리뷰에서 필립 말로, 트래비스 맥기, 87분서가 등장한다는 점 만으로도 리뷰어가 얼마나 고전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이름들을 봐서 좋았습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어느 작가의 어느 책으로 입문하면 좋을까요?
레이먼드 챈들러요.
레이먼드 챈들러.. 빅 슬립이 시리즈 첫 작품이니까 그거부터 읽어보세요. 물론 최근 번역된 것을 추천합니다.
제가 본 바로는 거의 모든 하드보일드 탐정은 필립 말로의 오마주이거나, 변형이거나, 안티테제이거나 합니다.
87분서 첫번째인 경관혐오도 동서문화사에서 나온거 있습니다.
진짜 기대했는데 분량이 너무 심각하더군요..아무리 800엔이라지만 쩝..
라스트 윈도우 정발 안된거 생각하면 이거라도 한글 정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류의 게임 정말 좋아하는데...
라스트 윈도우의 로토스코핑 제작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n3n6iz8S-4
그냥 카일하이드와 레이첼을 주인공으로 해도 되지 않았을까? 사실상 스킨만 바꾼 느낌
오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리뷰가 굉장한걸
주인공이 호텔더스크 생각나네요
800엔짜리라 풀보이스는 아니겠네요 ㅠㅠ 풀보이스면 좀 하기 편한데;;
그래도 살인 구락부 시리즈의 스즈키 리카씨는 CING 도산 후에도 꾸준히 현업에 계시더군요. 휴먼 아카데미 교수도 하시면서 후쿠오카 시내에 벨우드 라는 게임 개발사도 운영하시던데. 그리운 이름들이네요
잘보고갑니다
호텔 더스크 재밌게 했는데...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진짜 심각~~~하게 짧습니다. 이거 800엔도 비싸게 느껴질 정도로요.
호텔더스크-라스트윈도우 후속작이 나올 가능성은 없는건가요?? 뭐 나온다고해도 한글화는 해야 할수있지만.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