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임기 중 물러났다면…” 안타까움도 감지돼
고(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타계 1주기를 맞아 미 전역에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진보 진영에선 ‘긴즈버그가 그립다’는 목소리와 별개로 ‘긴즈버그가 좀 더 일찍 물러났더라면’ 하는 분위기도 있어 눈길을 끈다. 텍사스주(州)의 낙태 불법화 조치와 관련해 “대법원에 진보 성향 대법관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막을 수 있었다”며 긴즈버그를 원망하는 시선도 감지된다.
27일 미 연방대법원에 따르면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의 공식 취임행사(investiture ceremony)가 오는 10월 1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대법원 청사 내 특별법정에서 열린다. 배럿 대법관은 지난해 9월 18일 암으로 숨진 긴즈버그의 후임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그해 10월 27일 대법관에 취임해 벌써 1년 가까이 재직 중이다.
배럿 대법관이 미 연방대법원의 각종 심리 및 표결에 이미 참여하고 있어 이번 취임행사는 “순전히 의례적인 것”이란 게 대법원의 설명이다. 취임행사 참석은 배럿 대법관한테 초청을 받은 이들만 가능하며, 언론도 풀단을 꾸려 취재할 것으로 보인다.
미 언론은 배럿 대법관의 전임자가 바로 긴즈버그란 점, 얼마 전 고인의 1주기를 맞이한 점 등을 들어 그가 사법사에 남긴 발자취를 적극 조명하는 모습이다. 긴즈버그가 살아 있었다면 요즘 미국을 뒤흔드는 낙태 금지 논란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대세다. 실제로 지난해 배럿 대법관이 합류하며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의 구도가 굳어졌다. 보수·진보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민감한 사안에서 보수의 우위가 확고해진 셈이다.
여성의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 법률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도 보수 성향이 가장 짙은 텍사스주는 얼마 전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성폭행이나 근친상간도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등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판했으나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대법관 5(유효) 대 4(무효) 의견으로 텍사스주 법률이 유효하다고 결정했다. 배럿 대법관의 합류로 대법원이 예전보다 훨씬 더 보수화한 결과로 풀이된다.
진보 진영 일각에선 배럿 대법관의 전임자인 긴즈버그를 원망하는 눈치다. 긴즈버그가 좀 더 일찍, 그러니까 민주당 소속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2009∼2017) 도중에 은퇴하고 그 후임자를 오바마가 지명할 수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란 취지에서다. 오바마가 임명한 진보 성향 대법관이 대법원에 버티고 있다고 전제하는 경우 텍사스주 낙태 법률을 둘러싼 논란에서 5(무효) 대 4(유효)로 무효 판결이 나왔을 것이란 얘기다.
CNN 방송에 따르면 미국 진보 진영의 불만은 이제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을 향하고 있다. 1994년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임명된 브레이어 대법관은 1938년생으로 80세를 훌쩍 넘겼다. 진보 진영 법률가들은 브레이어를 향해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 행정부 임기 안에 그만두고 물러나라. 그래야 바이든이 진보 성향의 젊은 법조인을 새 대법관에 앉혀 보수 일변도의 대법원을 바꿀 수 있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브레이어는 은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미 언론에 따르면 그는 최근 “판사는 자신이 임명되는데 도움을 준 정당에 대한 충성심을 거부하고, 법치에만 충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부 시절 임명됐으니 같은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사퇴해 대통령한테 진보 성향의 젊은 법조인을 임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논리에 사실상 반기를 든 셈이다. CNN은 “긴즈버그 대법관과 대립적 사법 철학을 가진 사람에게 차기 대법관직을 맡기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고 싶다면, 브레이어는 가능한 한 빨리 물러나야 한다”는 UC버클리 로스쿨 어윈 케메린스키 원장의 발언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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