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로서의 비디오 게임 혹은 그 역, ‘슬픔의 집’
간단하게는 이런 공연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또 공연을 보고 우리나라 게임계를 돌아본 뒤 문득 든 생각들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공연 <슬픔의 집> 은 현대 미술 작가인 김지선 작가가 비디오 게임을 다룬 두번째 작업입니다. 김지선 작가는 이전까지 영상 작업물을 다수 선보였으며, ‘사회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을 선보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나/세계를 감각하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만 작가는 특별히 작품의 포맷이나 매체를 한정해서 작업을 하지 않는듯 했습니다.
공연은 작가와 그 팀이 직접 만든 게임을 스트리머가 플레이하면서 방송하는 방식을 따왔습니다. 여기서 무대 퍼포머로는 실제 게임 스트리머인 쥐님이 참여했죠. 사실 처음에는 게임을 공연, 혹은 전시로서 어떻게 풀어낼까 궁금했는데, 이런 방식을 빌린 아이디어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합니다. 즉, <슬픔의 집>은 게임 그 자체로 미디어아트 작품이며, 이번 공연은 그 작품을 공공 전시의 형태로 풀어낸 것이죠.
스트리머가 플레이하면서 말하는 소감 외에도 게임 자체에서 나레이션이 계속되며, 나레이션은 ‘작가’를 대변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작가’ 는 실제 김지선 작가와 동일한 존재는 아닙니다. 나레이션은 이 게임은 자신이 남미를 여행할 때 만난 한 친구에게서 받은 물건이라고 밝힙니다. 그 친구는 오래 전 사고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그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방법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논문을 읽고 ‘기억을 재 프로그래밍 할 수 있다면 기억과 연결된 이 고통스런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는 생각으로 남미의 아마존 정글에서 기억을 재프로그래밍 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죠. 그리고 그 일환으로 이 게임을 만들어서 플레이합니다.
게임은 몇 개의 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고, 직접 보지 않고 제가 설명을 한다면 작품의 전달력이 퇴색될게 뻔하기 때문에 그 모든 부분을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스테이지를 단계적으로 넘어가면서 작품은 전반에 걸쳐 ‘나’ 의 기억, 그리고 기억을 가다듬는 전세계 각지의 명상법 혹은 기억을 다루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게임을 만든 친구와 그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공연의 말미에는 게임 상의 스테이지, 즉 누군가가 기억을 담기 위해 만든 이 스테이지를 총을 들고 파괴하면서, 기억은 있는 그대로의 메모리를 불러내는게 아니라, 기억을 하려고 할 때마다 새롭게 만들고 구축하는 메모리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 게임은 이런 과정을 통해 불교의 물음에서 시작해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의 토속 신앙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류가 역사를 통틀어 기억과 정신을 대했던 다양한 방법을 마주합니다. 어떤 부분은 종교적 통찰이 담겨있고, 어떤 부분은 듣기만해도 의심이 드는 구절도 존재하죠. ‘이게 다 사실이야?’ 라는 의문은 당연히 들지만, 모든 창작물이 그렇듯 그 의문은 무의미 합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사유의 끝에 내리는 결론이죠.
약 한시간 동안 그렇게 게임은 플레이되고 우리는 플레이하는 스트리머와 게임의 화면, 그리고 게임 내에서 들려오는 나레이션으로 공연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게임이 향후 스팀을 통해 출시될 예정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플레이를 했던 쥐님이 퇴장하면서 공연이 끝납니다.
이 게임은 김지선 작가가 기획하여 두명의 개발자들이 참여해 함께 개발했고, 공연과 게임의 연출은 김지선 작가가 총괄했습니다. 때문에 그만큼 우리가 익숙한 ‘코어한 게임’ 으로서의 요소는 몇몇 빠져있고 어딘가 부족해보이기도 했지만, ‘개인이 플레이하고, 어떤 감정적 결과물을 얻는’ 가장 기초적인 게임의 정의에는 딱 부합했습니다.
현대 미술이란 장르가 사실 저는 유저 프렌들리 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친절해지면 그만큼 의미를 잃거나 퇴색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 본질적인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불친절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게임, 이 공연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전시가 어떤 의미인지 하나하나 모든 디테일을 풀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공연을 보고 느낀 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 공연이 비디오 게임 씬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김지선 작가가 단순히 이 공연을 1회성 퍼포먼스가 아니라, 정말로 <슬픔의 집> 이 전시나 공연을 벗어나 플레이되는 스탠드 얼론 게임으로서도 예술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지선 작가는 이 게임이 출시가 되고 또 게이머들에게 플레이되려면 어떤 부분이 필요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 듯 했습니다.
그만큼 게임이란 결국 플레이가 중요하고, 그 플레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작가 또한 이런 부분을 강조했죠. 때문에 어떻게 이 게임을 플레이어, 관객들에게 선보일지를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이번 전시 뿐만 아니라 정말로 이 게임을 출시하고 싶다는 계획도 그런 생각의 일환이 아닐까 합니다. 게임을 다룬 다른 미술 작품이 아니라, 정말 게임을 이제 하나의 현대 미술의 매체로서 선보이고 싶은 것이죠. 모든 영상 예술이 영화와 동의어가 아니듯 말이죠.
그동안 예술임을 자처한 게임은 많았지만, 대부분 이는 원래 게임을 만들었던 이들이거나 혹은 보다 비디오 게임에서 출발해 그쪽에서 접근한 이들이었다면, 김지선 작가는 오히려 현대 미술에서 출발해서 온전히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예술을 풀어내고 싶었던 듯 합니다.
예술을 자처한 게임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비디오 게임을 소재로, 또는 주제로 한 미술 전시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과 현대 미술을 모두 공부하고 좋아하는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작업들은 그리 많지 않았죠.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한때 한국 현대 미술계는 VR 이라는 새로운 문명에 열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수많은 작가들이 VR을 어떻게든 그들의 작업에 녹여내기 위해서 애썼죠. 그러나 제가 본 대부분의 전시들은 그 VR 을 그저 전시를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마치 스크린이나 TV, 캔버스 위에서 하던 작업이 그저 VR 로 옮겨졌을 뿐인 것들이 많았죠.
비디오 게임을 다루는 미술에서 문제는. ‘비디오 게임’ 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자 체험인데, 이것이 미술 작품이라는 공공 전시로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VR을 활용한 현대 미술들은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딱히 하지 않거나 잘 풀어내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였죠. 메타적인 부분을 이해하거나, 이용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여기서 비디오 게임을 최근의 트렌드 중 하나인 보는 게임으로 한 번 더 변화시켜, ‘게임’ 과 ‘공연’ 이라는 서로 다른 포맷의 중점을 잘 잡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임을 ‘보는 게임’ 의 형태를 빌려 미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업은 이전에는 대표적으로 2016년 두산갤러리 서울에서 선보인 강정석 작가의 2016년 작 ‘GAME I: Speedrun Any% PB’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가상의 한 게임을 스피드런하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플레이를 중계하는 형태를 빌려 영상 전시로 주제를 풀어냈죠.
강정석 작, ‘GAME I: Speedrun Any% PB’(2016) 스틸 컷(자료 출처: 두산아트센터)
김희천 작, <멈블>(2017) 스틸 컷(자료 출처: 두산아트센터)
이 외에도 현재 비디오 게임을 자기 작품의 일부로서 잘 활용하고 녹여내고 있는 현대 미술 작가로는 김희천이 있습니다. 김희천 작가는 2017년 작 <멈블> 에서 VR 을 단순히 플랫폼으로서가 아니라 작품의 일부로서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김희천 작가는 비디오 게임 뿐만 아니라 보다 대중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이슈를 다루어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저는 김지선 작가의 공연을 보면서 이들 둘 작가를 떠올리고 많은 생각을 했는데, 하나는 점점 더 현대 미술이 보다 진실되게 비디오 게임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비디오 게임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 매체가 공연 혹은 전시가 될 때 생기는 변화가 매우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공연은, 앞서 소개한 강정석, 김희천과도 다르게 그 자체로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업물이었다는 점이 그렇죠.
예술에서 중요한 덕목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물성(物性)에 대한 이해’ 입니다. 물성이란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뜻하고, 보통 예술에서는 작품에 사용되는 각 물질이나 매체, 또는 비물질적인 어떤 가치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씁니다. 그러니까 이들 세 현대 미술가들은 그 이전에 제대로 비디오 게임을 다루지 못했던 이들과 달리 ‘비디오 게임’ 이 가지는 물성에 대해서 연구했고, 그것을 잘 이용했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이 공연을 소개하고 또 다른 비디오 게임과 현대 미술의 접점들을 소개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비디오 게임계가 천년 만년 외치던 문화 예술로서의 게임의 입지를 오히려 현대미술계에서도 멋지게 잘 풀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게임계의 모두가 잘못하고 있다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본 위주로 편중된 국내 게임계에서는 이런 공연이 더더욱 의미가 깊지 않나 합니다.
그러니까 그겁니다. ‘예술적인 게임’ 을 외치는 국내 게임 관계자들은, 과연 ‘예술’ 혹은 ‘미술’ 의 물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게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저마다 목표로 하는 가치도 다르고, 사람들이 높게 사는 가치도 다르죠. 어떤 게임은 수준 높은 플레이성과 거기서 오는 재미를 추구하고, 어떤 게임은 그 안에 예술적인 혹은 사회적인 가치를 담아내려고 합니다. 또 여기서 금전적인 방법론도 잘 풀어내어 거대한 이익을 벌어들이는 게임도 있죠. 저는 이 모든 게임이 저마다 각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여러가지 게임 개발자, 관계자들이 있고 아예 이런 ‘예술적인 게임’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임도 있을 겁니다.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비디오 게임을 문화 예술로서 기치 천명하면서 실상은 정반대인 현재 우리의 상황입니다.
지난해 국내 게임계에 큰 이슈가 많았습니다. 특히 그중 하나는 질병 코드 등재를 둘러싼 논란들이었죠. 그리고 그 당시에 인기를 끈 슬로건이 ‘게임은 문화다’ 였습니다. 물론 이 슬로건을 최초 발안한 개발자의 의도는 어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비디오 게임이 가진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뜻이었지만, 저마다 이 슬로건을 들고 나서면서 통용되는 의미가 변질되었죠.
이 슬로건의 본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이미 그 대외적인 기표는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물론 ‘문화’ 라는 단어와 ‘예술’ 이라는 단어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저는 지금 이 슬로건이나 각종 이야기들의 성격, 진의는 비슷하다고 봅니다. 비디오 게임이 가진 산업적 가치가 아닌, 그 외에 다양한 인문 교양적인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현재 국내에서 비디오 게임이 문화이고 예술이라는 슬로건을 말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그걸 실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게임을 단순히 문화라고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은 복합적이죠. 문화예술이면서 동시에 산업입니다. 저는 이 양면을 다 인정해야만 게임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고, 또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비디오 게임의 예술적 측면,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이들보다는, 그런 그럴듯한 포장지를 빌려 금전적 실익을 노리고자하는 이 슬로건을 사용하고 있고, 그런 이들 덕분에 정말로 게임의 문화적, 예술적 활용에 집중하는 이들은 지원이나 관심에서 상당히 뒤로 밀려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번 공연은 공연의 내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많은 것을 시사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현대 예술이 비디오 게임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작품 내적인 의미와 또 외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입니다. 물론 그게 진짜로 이 전시 그 자체만으로 끌어들인 관심도는 아니었고, 전시에 참여한 스트리머의 영향이 결코 작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젊은 문화 소비자들이 현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중 몇몇이라도 앞으로 이 분야를 쭉 향유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의 집> 은 오는 여름 벨기에에서 개선된 버전을 공연한 후에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부디 깊은 의미가 있는 게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명규 기자 sawual@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