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틀레야 라비아타 Cattleya labiata는 카틀레야속 전체를 대표하는 모식종으로,
그야말로 카틀레야 계열 난초들을 대표하는 매우 유명한 식물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들이 난초를 수집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 난초에는 황당한 에피소드가 얽혀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벌브 썩음병으로 사망하신 본인의 카틀레야 라비아타)
19세기 초, 생물학자들이 세계의 여러 동식물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할 무렵에 있었던 일입니다.
1818년, 영국 글라스고의 박물관에 영국인 자연학자 윌리엄 스웨인슨이 브라질에서 채집했던 여러 표본들이 도착합니다.
여기서 살아있는 식물 표본들 중 일부는 스웨인슨의 요청으로,
당시 영국의 갑부이자 아마추어 원예가였던 윌리엄 캐틀리가 운영하던 식물원에 위탁되어 재배되게 됩니다.
그리고 5년 뒤, 스웨인슨이 채집한 식물 중 하나에서, 지금까지 유럽인들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화려한 꽃이 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카틀레야 라비아타였습니다.
이 꽃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은 매료되었고, 종묘업체들은 더 많은 모종을 채집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국을 강타했던 난초 광풍 (orchiderilium)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웨인슨은 자신이 카틀레야 라비아타를 어디에서 채집하였는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었고(···)
때마침 스웨인슨은 뉴질랜드를 탐험하러 떠난 관계로, 어디서 채집했는지 물어보지도 못했었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웨인슨이 마지막으로 탐험했던 지역인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근방에서 이 라비아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찾지 못했습니다.
리우 데 자네이루 지역에서는 라비아타가 살지 않거든요(····)
여러 탐험가들로부터 라비아타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막상 꽃을 피워보니 다른 식물들이었습니다.
카틀레야 모시아이, 카틀레야 막시마, 카틀레야(랠리아) 푸르푸라타, 카틀레야(랠리아) 로바타가 이 소동 사이에 발견된 식물들이었습니다.
마침 브라질에서 커피 농사가 붐이 일어나면서 원시림들이 대량으로 벌목되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커피 농사를 짓느라 라비아타가 서식하는 숲이 이미 파괴되어서 멸종된 것이 아니냐는 절망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했지요.
그래서 식물학자들은 카틀레야 라비아타가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1819년, 윌리엄 스웨인슨이 자신의 논문에서 브라질 탐험을 저술하면서,
자신이 페르남부쿠에서 시작해서 리우 데 자네이루까지 탐험했다고 명시했었는데···
이것이 가장 큰 힌트였습니다.
바로 라비아타의 서식지는 페르남부쿠였거든요.
문제는 이 논문이 식물학이 아니라 자연/철학사 관련된 잡지에 게시된 관계로(···)
식물학자들이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게 문제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70년이나 카틀레야 라비아타는 환상 속의 식물로 남아있다가,
1880년 중반에 페르남부쿠를 탐험하던 프랑스의 한 곤충학자인 모로에 의해서 다시 발견되게 됩니다.
한편 이 사람은 취미로 집에서 꽃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것이 대체 무슨 꽃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꽃이 하도 이뻐서(···)
모종을 한 박스 채집해서 파리로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모로와 친했던 영국인 원예가 샌더라는 사람이 1889년에 모로의 집에 놀러왔다가
카틀레야 라비아타가 온실 한켠에 떡-하니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로에게서 이것을 페르남부쿠에서 채집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영국 왕립 원예학회에서는 이 라비아타의 귀환을 그야말로 반지의 제왕의 왕의 귀환 수준으로 열광했고(···)
1889년부터 8년 동안 영국의 화훼 박람회의 최우수상을 이 라비아타 혼자서 독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난초 붐을 일으켰던 라비아타는 70년만에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attleya_labiata
http://www.aos.org/orchids/additional-resources/cattleya-queen-of-the-orchids.aspx
와! 재미있네요! 운명의 엇갈림이라니 ^^ 그래서 더욱 발견이 극적이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