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 71권, 광해 5년 10월 29일 계축 2번째기사 인빈 김씨의 졸기
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가 졸하였다. 【빈은 의안군(義安君)·신성군(信城君)·원종 대왕(元宗大王)·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는데, 술수가 있어 미봉을 잘하였다. 그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였는데, 이산해가 드디어 유언비어로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빈이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았다. 왕의 어머니인 공빈(恭嬪)이 본래 인빈과 틈이 있었는데, 공빈이 산병(産病)으로 죽자 인빈이 그 대신이 되었다. 왕의 형제에 대한 총애는 드디어 줄어들었고 산해가 대신을 참소한 것은 이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왕의 형제가 이 때문에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도 역시 인빈을 위해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임해군이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 심지어 도승지 유희서의 첩을 빼앗으려고 유희서를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등 죽을 죄를 지었어도
아버지 빽 덕분에 아무런 죄도 안 받고 호강했기 때문에 선조가 임해군에게 안 좋은 아버지 였다는 게 이상할 수 있는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임해군의 친모 공빈 김씨가 사망하고 친모의 라이벌인 인빈 김씨가 공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던 총애가 줄어들었기 임해군이 인빈을 매우 원망했고 인빈 김씨의 가문 사람들이 임해군을 위험하게 여겼다고 전해 짐
임해군이 아버지에게 사랑을 못 받았다고 느껴서 애정결핍을 느낀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