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마치고 교수님을 뒤에 두고 쓰는
교수님의 검수 하에 쓰는
고려사 전공 대학원생의 유게 고려사 시간입니다.
이번 글은 아조씨 유게이들이 아마 드라마로 봤을 '무신정변'이 주제가 되겠습니다.
제 글은 항상 『고려사』/『고려사절요』/박용운 선생님의 「고려시대사」를 바탕으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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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신정변의 배경은 고려 초기부터 이어져온, 이른바 '귀족정권', '우문정책右文政策'의 붕괴에서 시작된 일이죠.
그리고 무신정변은 사실 실제로 일어나기 100년 전 이상에 이미 그 예고편이 있었습니다.
바로 현종 5년(1014) 일어난 김훈,최질의 난이죠.
이 반란의 원인은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 관리들의 녹봉에 충당한 것에 불만을 가진 무신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최근 드라마였던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나왔던 사건이죠.
이 반란은 빠르게 제압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무신들이 불만을 가질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우선, 관직체계에서의 불만입니다.
고려는 2품 이상의 '재신'이라는, 이른바 재상과 비슷한 취급의 직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신의 최고 품계는 정3품, 상장군이 끝이었죠.
즉 무신은 재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신'이 맡아야 할 군의 최고통솔권 역시 무신이 아닌 문신이 맡았죠.
대표적인 예시가 귀주대첩의 강감찬, 동북 9성의 윤관이죠.
우리는 장군이라고 흔히들 불러서 무신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문신'에 속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최고통솔권을 맡을 수 있었던거죠.
뿐만 아니라 묘청의 난을 제압한 김부식 역시 문신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시 고려에서 무신이란?
▶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전투기술자 내지는 귀족정권의 호위병 으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이 문장은 박용운 선생님의 「고려시대사」에서 인용했습니다.)
거기다 온갖 부역, 용역 등에 동원되는 것은 무신들이니, 불만은 더 커져갔죠.
여기서 무신들을 개빡돌게 하는 사건이 2개 발생합니다.
먼저 첫번째 사건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당시 왕의 친위대장 급이었던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지른 사건입니다.
여기서는 『고려사』반역 열전 정중부 편의 내용을 조금 인용해보겠습니다.
- 그때 내시 김돈중(金敦中)이 나이는 어렸지만 기백이 날카로웠는데, 그만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다.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리고 욕을 보이니,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金富軾)이 화를 내고 왕에게 정중부를 처벌하자고 아뢰었다.
검증되지 않은 기록에 따르면 정중부는 그 수염이 아름다워 자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돈중이 그 수염에 불을 지른거죠.
빡돌아버린 정중부는 김돈중을 그 자리에서 두들겨팹니다.
그런데 김돈중의 아버지는 위에서도 나온
김부식, 당시에는 최고 재상급에 있던 사람이었죠.
김부식은 마치 ㅁㅁ마냥 정중부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려댑니다.
인종의 보호로 정중부는 딱히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건 문신들이 무신들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있었죠.
위의 사건이 있은지 시간이 흐르고, 왕도 바껴서 의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때 의종은 보현원이라는 곳으로 행차하고, 거기서 연회를 열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무신들은 각자의 무예를 뽐내는 '오병수박희'라는 일종의 무예뽐내기를 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종3품 장군 이소응이라는 노장이 자리에서 빠져나오는데...
한뢰라는 젊은 문신이 이소응을 욕보이며 싸대기를 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기록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은 비록 무인이었으나 야위고 힘이 약하여, 다른 사람과 수박희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도망갔다.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서 이소응의 뺨을 때리니 〈이소응이〉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왕과 여러 신하들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復基)도 이소응을 욕하였다.
사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한뢰는 진짜 새파랗게 젊은 문신, 말하자면 이제야 7급쯤 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반면 이소응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종3품 대장군이었죠. 지금으로 치면 군대 중장이겠네요.
그런데 7급 20대 공무원이 나이든 중장 뺨을 때린다? 지금이면 뉴스에 날 사건이겠죠.
아무튼 이 두 사건은, 참고있던 무신들의 분노를 터뜨리기 충분했습니다.
거기다 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죠.
-〈왕이〉 벽잠정(碧岑亭)에 행차하려 하니, 어사대(御史臺)가 대궐문 앞에서 엎드려 이궁(離宮) 행차가 빈번한 것과 안찰사(按察使)·찰방사(察訪使)가 법을 어기는 일을 논하였으나 왕이 전혀 듣지 않았다.
- 각각 관료를 두어 각 도(道)로부터 비용을 징수하게 하였으므로 3궁으로 재물을 수송하는 사람들이 길에 잇대었고 백성들은 모두 근심하고 한탄하였다. 내시 유방의(劉邦義)·진득문(秦得文)·이송(李竦)·김응화(金應和)·김존위(金存偉)·정중호(鄭仲壺)·희윤(希胤)·위작연(魏綽然) 등은 환시(宦寺)와 깊이 결탁하여 의형제를 맺음으로써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剝民] 왕에게 아첨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처럼 의종 치세는 막장이었고, 민심 역시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런 사건들까지 터지니, 결국 무신들이 칼을 뽑게 되는데 이것이 무신의 난입니다.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 무신들이 결국 왕을 포위하고 문신들을 참살합니다.
기록을 빌려오면 다음과 같죠
- 저물 무렵 어가(御駕)가 보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이 앞질러 가서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순검군(巡檢軍)을 모았다. 왕이 원문(院門)에 막 들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려는데 이고 등이 임종식(林宗植)·이복기(李復基)·한뢰(韓賴)를 죽였으며, 왕을 모시던 문관 및 대소 신료(臣僚)·환관[宦寺]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또 개경에 있던 문신 50여명도 살해되었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직후. 약 1달도 지나지 않아서 의종은 폐위당합니다.
- 기묘 왕이 혼자 말을 타고 거제현(巨濟縣)으로 쫓겨 가고, 태자(太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문신들이 살해당하고 의종은 궁으로 압송, 강제로 폐위당하게 됩니다.
그 이후는...
- 명종(明宗) 3년(1173) 8월 김보당(金甫當)이 사람을 보내어 왕을 모셔다가 계림(雞林)에 살도록 하였는데,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나이는 47세로서 왕위에 25년간 있었고 왕위에서 밀려난 지 3년만이었다. 시호(諡號)는 장효(莊孝)이고 묘호(廟號)는 의종(毅宗), 능호(陵號)는 희릉(禧陵)이다.
이렇게 의종은 살해당하고 명종이 즉위, 본격적으로 고려 무신정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무신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고려 최대의 혼란기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무신정권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로 달아주시면
제가 아는 선에서 혹은 교수님과 함께 최대한 답변드리겠읍니다.
김돈중이 정중부 수염 태워먹은거 이전부터도 조짐이 보이긴 했었군요...
더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