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군 "우린 정말 광주시민들이 빨갱이인줄 알고 그랬던 거에요!"
그 형은 광주계엄군이었다
며칠 후 그는 내게 전화를 했다. 그날 술집에서의 일을 그는 정중하게 사과하고 한 번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어느 주말 오후에 조용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찻집에서 그는 내게 자신의 충격적인 군대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었고 그 후 삼청교육대 교관을 하다가 제대했다. 다음은 그날 그가 광주계엄군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 해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가 광주에 투입되기 전 상관들은 광주에서 반정부 반란군이 도시를 점령하며 시위를 하고 있고 그들은 모두 '빨갱이'나 좌경분자들이라고 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상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런 '빨갱이들'에 대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우리들은 총에 대검을 끼고 실탄을 넣었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었지만 나는 그 대검으로 '빨갱이'들을 찌르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했다. 잡혀온 '빨갱이'들은 개처럼 두들겨 패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겼다. 진압봉과 개머리판 그리고 군화발로 온 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처음에는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우리 군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실제 사람을 패서 죽이고, 총으로 쏴서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것을 몇 번 보는 순간부터는 감히 항의하는 시민도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우리를 무서워하며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잡혀 온 수백 명의 남녀노소 '빨갱이'들은 넓은 공터에서 우리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들은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었다. 오리걸음으로 선착순을 반복했고, 그중에서 늦은 '빨갱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죽도록 맞았다.
나는 광주시내 여기저기서 죽어 넘어져 있는 시신도 여럿 보았다.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xx들은 다 죽여야 해"라고 떠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감히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다녀" 하며 잡혀온 민간인들에게 심한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한 번은 밤에 어디서인지 모르는 방향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아 전우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 일로 '빨갱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더욱 커갔다. 그 후 우리 손에 잡히는 '빨갱이'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가스 연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함, 비명, 절규들은 생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우리들은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런 상황을 초래한 '빨갱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전우 중에는 지난 밤 몇 놈을 대검으로 통쾌하게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이도 있었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부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ㅆㄴ"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신혼부부까지 무자비한 구타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신혼부부로 당시 공용터미널 중간부분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공수부대원들이 택시를 세우고 이 부부를 끌어내려 무작정 곤봉 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래턱이 빠진 상태로 심한 부상을 입었으면 부부가 함께 머리 등에도 상처가 났었다. 나중에 이 부부가 병원에 다시 온 적이 있었는데 남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이나 구경하던 사람을 때릴 때는 3~4명이 한 사람을 거의 반 죽음 상태까지 집중적으로 구타하는 수법을 써서 부상자들은 두피가 갈라지고 그 자리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들 부부도 택시에서 신혼부분답게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 여러명이 달려들어 집중구타를 해 남자는 거의 반죽음 상태였고 여자는 옷이 다 찢어져 입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아주머니들이 옷을 입혀서 산수동쪽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정말 딱한 일이었다.
심재영(심산부인과의원장. 당시 심산부인과의원장), 상대는 대부분 오른쪽 머리부위, 5.18 의료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 206~207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ㅆㅍ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17]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21~122」
김성수 씨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사건 당시 고향인 진도로 가려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시내를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계엄군이 막았고 다시 북쪽에 있는 담양쪽을 나가려했으나 계엄군(3공수여단)이 막았다. 아내 김춘화씨는 울면서 보내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했다. 계엄군은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총으로 위협까지했다. 김성수 씨는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딸을 차에 태웠고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차를 향해 계엄군은 무차별로 쏴댔다. 돌아가라 시켜서 돌아간건데 오히려 그 사람들을 무차별로 쏴댄 것이다. 김성수 씨는 의식은 있었지만 아내와 딸은 혼수상태였다.
아내인 김춘화씨는 뇌수술을 세번이나 받고 정신이상증세까지 걸렸다. 나중에 차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딸 내향(당시 5살) 씨는 하반신 마비가 됐다. 출처 출처
그리고 현실.
계엄군 새끼들이 진짜로 초등학생이랑 임산부랑 여고생이랑 예복 입은 신혼부부가 반정부 반란군, 빨갱이, 좌경분자라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이 새끼들은 특전사가 아니라 정신지체장애 복지시설에 가 있어야 했음.
한마디로 계엄군 새끼들의 저 변명은 좇까는 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