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이번 편은 굉장히 어려운 편이 될 수도 있다만 각오는 되어 있나?"
"그럴 각오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쪽 계통을 파지도 않았어."
"좋은 자신감이군. 좋다. 설명을 시작하지."
"안피양구의 본래 이름은 피양구였다. 그런데 왜 안피양구라고 불렸냐면, '안'이라는 명사가 후천적으로 피양구라는 본래 이름에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피양구는 원래 기오르차 가문의 사람이었다. 기오르차 가문은 그리 뛰어난 가문은 아니었는데,
피양구의 아버지인 왐불루서부터 누르하치의 가문을 섬기고 있었지. 왐불루는 무척이나 충성심이 높은 인물이었는데,
교로 가문을 배신하라는 적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교로 가문을 배신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피양구 역시 그런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던 지라 자신의 주군이자 자신과 동갑인 누르하치에게 어렸을 적부터 충성을 바쳤다."
"피양구는 누르하치가 거병하기 전에 '암바'호칭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암바'는 '크다(大)'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인데, 피양구의 이름을 크게 띄워주는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가장 어려웠을 때, 즉슨 아버지로부터 적은 재산을 분배받고 거의 쫓겨나듯이 분가를 했을 때에
피양구가 곁에서 그를 지켜준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지. 그 때부터 피양구는 '암바 피양구' 혹은 '암반 피양구' 불리게 되었다.
암바 피양구와 암반 피양구가 혼용된 이유는, 암바와 암반이 혼용이 가능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암바 피양구? 안피양구랑은 좀 다른데?"
"계속 설명할 테니까 그냥 듣고 있어!"
"어쨌든, 그렇게 피양구의 호칭은 암바 피양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수십년동안 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하여 후금의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1622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시기까지는 틀림없이 암바 피양구 혹은 암반 피양구라고 기록되던 이름이, 후대인 지금서는 안피양구로 표기, 호칭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불명이다."
"뭐야! 이유도 모르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바는 있으니까 조용히 있어!"
"암바 피양구가 죽은지 수십년 뒤(17세기 중~후엽)에 편찬된 태종문황제실록과 고황제실록서, 암바 피양구의 이름이 변화한 흔적이 보인다.
그 사서들의 한문본에서 암바 피양구는 안비양고(安費揚古)로 기록되었다.
여기서 비양고(費揚古)는 피양구의 한문표기이며, 안(安)은 그의 접두칭호가 한자로 표기된 것이다.
그런데 암바/암반 부분이 한자로 표기되었다면 한자로도 '암반'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이들 실록보다 먼저 편찬된 무황제실록의 한문본서도 암반의 고유명사 취급 음역이 '암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안(安)으로 표기되었을까? 그것은 암바 피양구의 '암바' 부분이 이미 이 시기에 '안'으로 축약기록 혹은 인식변화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이 때에 이미 암바 피양구가 안피양구로 변화해가고 있던 것이지. 그러던 것이 시간이 계속 지나 완전히 안피양구로 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
"뭔가 그럴듯하면서도 미묘한데..."
"잠깐. 아까부터 듣고 있었는데 질문이 있다."
'저 크와트로 바지나란 인간 또 왔네.'
'군복이나 제대로 입고 다니지.'
"순치~강희제대의 태종문황제실록과 고황제실록서는 암반 피양구가 한자표기로 틀림없이 안비양고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의 이름이 안피양구로 변화해가고 있다는 근거가 되지.
그러나 저 사서들의 편찬시기보다 후대인 건륭제 시기에 편찬된 만주실록서는
안피양구가 암반편격(諳班偏格)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안'으로 축약표기되던 '암반'이 다시 살아남으로서 안피양구의 이름이 다시 '암바/암반 피양구'로 회귀한 것이지.
그런데 어째서 현대에는 안피양구로 고착화 된 것이지?"
"물론 만주실록에서 안피양구가 한자로 암반편격으로 기록된 탓에 건륭제 시기에 그의 이름이 '암반 피양구'로 회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만주실록의 특성 때문입니다.
만주실록은 고황제실록보다 이전에 존재하던 최초의 실록, 무황제실록을 거의 원문 그대로 따온 사서입니다.
물론 인명과 지명의 한문 번역명을 좀 더 '고상한' 표기로 수정하긴 했습니다만 '암반'이라는 음역표기를 수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덕분에 '안'비양고라는 표기 대신 '암반'편격이라는 표기가 쓰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염두에 둘 것은, 만주실록과 동시기에 황청개국방략도 편찬되었다는 것입니다.
황청개국방략은 만주실록보다 훨씬 광범위한 시기를 다루는 사료였고, 그렇기에 만주실록보다도 대규모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청개국방략에서도 안피양구가 고황제실록의 전례를 따라 안비양고安費揚古로 기록됐습니다.
즉, 이 시기에 안피양구의 이름표기가 다시 암바 피양구로 회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안피양구라는 기조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민국시기에 편찬된 청사고가 결정타로 작용했습니다.
청사고 열전에서도 안피양구가 암반편격이 아니라 안비양고安費揚古 로 기록되었는데, 황청개국방략과 고황제실록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아서 험멜과 방조영, 두연철의 협업작업으로 편찬된 명저 , '청황조의 명사(Eminent Chinese of the Qing Period)' 에서도 역시 청사고 열전을 수용,
한자로 안비양고로 기록하고 만주어 이름을 안피양구로 기록했습니다.
덕분에 안피양구/암바 피양구의 이름이 '암바 피양구'보다는 '안피양구'로 서술되는 기조는 20세기 무렵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 궁금증이 해결되었으니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이상한 인간이야."
"그러게."
"어쨌든, 결론을 요약하자면, 후금의 5대 개국공신이자 누르하치의 가장 뛰어난 장수중 하나였던 안피양구의 본래 이름은 피양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호칭으로 암바 칭호가 붙어 암바 피양구가 되었는데 후대에는 이것이 변화하여 안피양구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지.
어쨌건간에 지금은 주로 안피양구라고 불린다."
"뭔가 굉장히 쓸데없는 인간이 등장해서 글이 엄청 길어진 것 같군."
정산
신규짤이구먼...빠르네 이동네 =_=
노아쨩은 내 침대위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