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는 재수가 일박 이박 삼박 터지며 더럽게 운이 안 좋은 날이었다.
서울 가는 버스가 하루 두 대밖에 없는 시골에서 어린이집 교사를 하는 나. 그런데 오늘 두 명의 아이가 열이 37.7도까지 치솟았으며 한 아이는 비닐을 목에 감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비닐이 목을 졸라 상처를 입었다.
이런 젠장, 하고 야근 비스무리한 7시 퇴근을 하고 슈퍼에 간 나.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걸 맞받아 인사했다. 라면 두 개, 맥주 세 캔, 햇반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렸다.
그런데 슈퍼 의자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중국집 사장님 부부였다.
이분들은 소신이 있는 분들로, 차로 가면 1분마다 군부대가 나오는 이 시골에서 굴지의 장사 철학을 지니신 분들이었다.
한 번 들어주면 끝이 없으니 내 가게에선 내 마음대로 하겠다.
맛만 없었다면 망했을 텐데, 소신을 가지니 맛도 있는 걸까. 그 가게는 항상 문전성시였다.
때문에 평소에 내가 거듭 요청하는 바람도 쿨하게 씹으시는 분들이었다. 이 가게는 탕수육에 소스를 붓는 곳이었다.
볶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붓는다. 처음엔 바삭해도 시골 인심답게 가득한 탕수육의 막바지를 맛보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다.
"아, 그게 맛있는 거여. 바삭한 게 좋을지 몰라도, 나중가면 소스에 푹 젖은 탕수육의 맛을 알 거라니깐?"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그게 싫었다.
슈퍼에서 만나 슈퍼 사장님에게 "오늘이 월요일이 아니라 금요일 같아요."라고 푸념하는 나.
거기에 중국집 사장님이 "벌써 힘들면 쓰겠어?"라고 말하신다. 나는 그러면 "소스 안 부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다시 요청했고, 사장님의 위의 이유를 들어 다시 거절하셨다.
슬퍼하며 라면과 맥주를 마시려고 슈퍼를 나가려고 하니, 중국집 사장님이 나를 멈춰세웠다.
"힘들면 캔 맥주 하나 사줘?"
올해 초임으로 이곳에 와서, 동네 주민이 처음으로 베푸는 '쏨'이었기에 난 흔쾌히 받아들였다.
중국집 사장님은 슈퍼 냉장고에서 카스 세 캔을 가져와 바로 깠다. 계산은 하지도 않고. 역시 시골 인심은 대단하다. 후결제 시스템이 피시방이 아니라 슈퍼에서 발휘되다니.
카스를 깐 사장님 내외와 나는 건배를 하였다.
"건배!"
"마시고 쭉 풀어내려!"
355ml의 작은 카스캔. 하지만 술찌인 나는 그것조차 원샷하지 못했다.
사장님의 인생 경험이 흘러나왔다.
"결국 거기는 경력이야. 알간? 내 동생이 말이야. 너랑 똑같은 직장에 다녀. 경력 몇 년이야?"
그 대답은 내가 아닌 슈퍼 사장님이 대신 하신다.
"저 선생님 이번이 처음이야!"
"아, 처음이야? 그럼 더 힘들겠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장님은 남편에게 묻는다.
"내 동생은 경력 쌓이고 나니까 이것저것 다 하더라. 그 실업자가 받는 수당 그게 뭐였지?"
"퇴직금?"
"그거 말고."
"실업 급여?"
"그거 아닌 거 같은데."
남편 분 대답이 맞는 거 같아서 나도 거든다.
"실업 급여 맞는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럼 실업급여. 그걸 안 주는 원장들도 많단 말이야. 근데 내 동생은 경력이 쎄서 그런 거 다 받고 다녔어. 집에 있자니 심심하고 그러니 파트타임으로 하다가, 힘들면 '저 좀 쉴게요.'하고 실업급여 받는 거야."
"어마어마하시네요."
"그러니까 선생도 경력 좀 쌓아봐. 지금이 힘들지 경력 쌓잖아?"
사장님은 진지한 얼굴로 말씀하신다.
"그래도 힘들다. 푸하핫."
남편 분은 고개를 저으면서 맥주를 들이키셨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선생은 좀 나아. 요즘 코로나 때문에 독박 쓰는 어린이집도 얼마나 많은데."
"맞아. 교사들이 전부 코로나 걸리고 교사 한 명 남았다? 0세부터 5세까지 전부 한 교사가 맡는 거야. 그럼 보육이 되느냐? 방목이지 방목. 거 선생도 방목 해보는 게 어때?"
그 말이 아픈 기억을 찌른다.
"방목하니 애들이 다치더라고요."
"그럼 그렇지. 노하우가 없어서 그래. 애들 딱! 주의 주고 하면 그런 거 없는데."
내 카리스마가 부족한 걸까. 애들한테 주의를 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다시 캔맥을 들이킨다.
"어쩌다 제일 힘든 일로 왔어. 차라리 남간호사를 하지."
"제가 성적이 안 돼서요."
"머리 좋아보이는데? 남자간호사가 짱이야. 내 동생이 이십 대 때 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서 동생을 일으켜 줄 간호사가 없었어! 재활치료를 하러 나가야 하는데 간호사는 못 들지, 나도 여자라 못 들지. 당최 수단이 없는 거야. 매일 너무 힘들었는데, 어느 날 병원에 남간호사가 배정된 거지."
사장님은 감회가 깊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간호사가 들어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술 취한 여자 부축하려면 힘들지? 근데 남자는 어떻게든 하잖아. 바로 그거야. 내 동생 재활치료 남간호사 덕분에 잘 됐어."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선생도 남간호사 하지."
"제가 머리가 나빠서요."
"그러니까 안 나빠 보인다니까!"
"아, 근데 동생이 간호학과이긴 해요. 남자."
"오! 동생이 잘 갔네."
"근데 집에를 안 내려와요."
"엉?"
사장님이 비죽 입을 내밀며 나를 힐난했다.
"집이 저쪽 아래라며! 동생은 어딘데!"
"강릉이요."
"그럼 못 내려가지!"
"여기보단 내려가기 편한데요?"
"그건 댁이 돈도 벌고 하니까 그러지. 간호사가 얼마나 힘든데!"
"그래도 명절에 안 내려오는 건 좀......"
"간호학과가 어디 갈 힘이 있간! 다 힘들고 그러니까 내려오는 것도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는 거야."
"그런가요......"
"그런 거지. 어이 신 씨!"
사장님이 새로 들어온 아저씨에게 말을 건다.
"뭐하다 이제 들어와?"
"장사하다 왔지."
"얼마 벌었는데!"
"오늘 이십 벌었나?"
"그럼 술 사!"
"아니, 양주 먹을 건디."
그리 말하며 신 아저씨는 헛개수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허, 고급지기도 하셔라. 그리 돈 벌었으면 마누라한테 맥주나 사라."
"이쪽 사정엔 신경 끄시고."
"머리는 무슨 젊은이같이 해가지고. 그게 댁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슈?"
"이게 뭐 어때서."
"늙은이가 투블럭이 뭐야 투블럭이!"
그 말에 내가 옆에서 신 아저씨를 거들어드렸다.
"왜요, 멋지신데요. 저 머리 스타일이 안 따라주면 하지도 못해요."
"뭐?"
사장님은 질색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신다. 사장님 남편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 주인 남편처럼 대머리인 것보단 낫잖아."
이번엔 슈퍼 사장님이 발끈하셨다.
"대머리가 뭐 어때서! 난 남편 괜찮은데!"
"그 대머리가 이혼 사유도 되는 거여."
"이혼은 개뿔. 그런 거 없거든."
"퍽이나 그러겠다."
"아니 근데 여기 사장님도 멋지신데요?"
마지막 내 말에 중국집 사장님 내외께서 경악하신다.
"멋, 져? 육시랄 그 이장놈이 두 번 멋지면 사람을 아주......"
"저 맞이해주실 때 얼마나 젠틀하신데요."
"그건 선생이 여기 팔아줘서 그런 거고. 내 남편 봐."
남편 분께서 맥주를 다시 들이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처럼 여기 사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 쌍노무시키는......"
"봤지?"
"어, 음. 그렇군요."
뭐, 말은 살벌하지만 그만큼 친하다는 뜻이겠지.
그 사이 신 아저씨가 나가려 하신다. 중국집 사장님이 신 아저씨를 붙잡는다.
"뭐 사주고 가라니까!"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사줘!"
"오늘 이십 벌었다면서!"
"그거 내가 써야 돼!"
"그럼 여기서 한 잔 마시고 가든가!"
"양주 마셔야 한다니까!"
옥신각신 끝에 신 아저씨는 결국 새우깡 하나를 던져주셨다. 중국집 사장님은 슈퍼 사장님에게 윙크를 날렸다.
"이 새우깡 여기 킵해둬야겠다."
슈퍼 사장님은 질색하신다.
"저기 선생님이나 줘. 무슨 킵이야."
그 말에 나는 먼저 사뒀던 신라면 봉지를 부술 준비를 했다. 그러자 중국집 사장님이 손을 훠훠 내저으며 말렸다.
"라면은 끓여먹는 거지 왜 부수려고 해. 새우깡 먹어."
새우깡을 우적거리며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정치인 이야기도 나와서 고통의 시간도 있었지만, 내게 조언이 한가득 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신 아저씨를 한 번 더 겁박하여 얻어낸 두 캔째 맥주를 마시며, 중국집 사장님이 말하셨다.
"이 캔만 하고 끝! 선생도 내일 애들이랑 죽어라 해야하니 일찍 들어가야지. 그래서 이거 다 얼마야?"
슈퍼 사장님이 심드렁하게 말하셨다.
"만 이천 사백원."
그와 동시에 중국집 사장님 내외가 발끈하신다.
"사백원은 어디서 나온 건데!"
"거기 있는 거 다 합치니까 나오지."
"육백원도 아니고 칠백원 상품에서 사백원이 어디서 나와!"
"내일 계산해. 내가 보니 당신들 취해서 제정신 아니야."
"우린 지금 제정신이야! 내일 되면 우리 돈 떼먹는다?"
"어차피 지금 외상하려고 했잖아."
"외상 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들기 시작했다."
중국집 사장님 남편이 먼저 사두었던 마른 오징어 다리를 뜯는다.
"이거 두 개 놓고 갈 테니까 사백원 깎아줘!"
"그래, 놓고 가."
"으이구 주책아! 그걸 왜 뜯어! 뜯지 마!"
이제는 중국집 사장님 내외의 난투가 시작되었다. 그걸 조용히 지켜보며 마지막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결국 승리한 건 중국집 사장님이었다. 만 이 천원을 현금으로 내놓고 손을 까딱하며 내게 말한다.
"나 간다. 잘 들어가시고, 음."
마지막 한 마디가 좀 싫었다.
"그냥 부어서 먹어."
그렇게 월요일 밤의 슈퍼 술자리가 끝이 났다.
자......
다음날 출근인데 술 취한 상태인 나.....어떡하지.....
3줄 요약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