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반정으로 이이첨 정인홍 같은 대북의 영수들과 폐모론에 반대한 소북의 영수인 유희분이 반정공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형되고
폐모론에 반대해서 대북 정권과 척을 진 중북 유몽인이 반정 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 했기에
광해군을 복위 시키려 했다는 유응형의 모함을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 당하고
마찬가지로 유몽인 처럼 폐모론에 반대했던 기자헌이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이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북인 정치범들과 함께 억울하게 처형당한다.
이런 가혹한 처벌에 분노한 북인들이 끝없이 인조 정권에게 반격과 도전을 시도한다
1624년 광해군 시절 삼정승을 지냈던 북인 박홍구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 된다.
1627년 후금과 화평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인거가 반란을 일으킨다 훗날 유효립 세력과 연계 되었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1628년 음력 1월에 광해군의 처조카 유효립이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실이 들통난다
유효립 세력은 무려 광해군의 친필 편지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광해군의 후궁이자 임취정의 조카인 소용 임애영이 자결하고 광해가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1628년 음력 4월 임취정이 광해를 복위하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1629년 양경홍이 후금과 내통해서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1631년 정한추대사건이 발각된다 이 역모사건에는 대북파와 소북파가 함께 힘을 합쳤다고 하며
정인홍의 조카들도 동참했다고 전해진다 광해군을 복위하고 인성군의 아들을 세자로 세울 계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북의 잔당 세력은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자 기뻐하며 소를 잡으며 서로 축하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