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저저 소생의 아들, 홍타이지. 후금의 2대 한, 청 태종. (삽화 출처 : 칼부림)
1603년 누르하치의 부인중 한 명인 여허나라 씨족의 몽고저저가 병사했다. 누르하치는 몽고저저가 병사하기 이전 그녀가 자신의 모친을 보고 싶어한다는 점을 들어 여허측에게 그녀의 모친, 본인으로서는 장모를 허투 알라로 보낼 것을 설득했으나, 당시 동여허의 버일러이자 여허 전체의 상급 군주였으며 동시에 몽고저저의 오라비이기도 했던 나림불루는 누르하치의 설득을 거부했다. 몽고저저가 실제로 아픈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친을 허투 알라로 보냈다가는 인질과 비슷한 형태로 억류되어 외교적인 약점이 될 것을 염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기에 나림불루는 단지 시녀만을 보내어 몽고저저의 병문안을 하게 했으며 누르하치는 이에 극히 분노하여 여허와 자신 사이에 지금까지 쌓인 원한들을 열거함과 동시에 여허의 종실 여식이 모친을 보고 싶다고 하는데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을 지적, 여허에게 적대선언을 한다.
이 이후 몽고저저가 실제로 병사한 뒤 누르하치는 그녀의 장례를 융숭히 치룬 뒤 1604년 음력 1월 본인이 공언했던대로 여허를 공격했다. 이 결과로 여허의 장과 아키란 두 성이 함락당했으며 그 주변의 일곱 개의 부락 역시도 일시적으로 누르하치의 세력권이 되었다.1
누르하치는 해당 지역에 대한 점유권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리품 역시도 얻었다. 청태조고황제실록에 의하면 이 때 누르하치는 '약 2천여인의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
그런데 사실 이 때에 서술된 누르하치가 획득한 2천여인의 포로라는 것은 본래 만문인 사료 혹은 실록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이다. 만문 기록에서는 이 때에 2천여 올지(olji)를 획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3, 올지는 그 직관적 의미상 포로를 뜻하나 실제로는 인명포로 뿐 아니라 가축이나 귀중품등의 물자전리품 역시 모두 포괄한 '노획 전리품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청태조고황제실록의 한문본에 실린 2천여인을 포로로 잡았다는 서술은 만문기록을 한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올지 2천을 포로 2천여인으로 해석한 결과이며 청의 국내에서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잘못된 번역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4
실수라 함은 청의 국내 사관들이 만문을 한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올지를 일괄적으로 포로로 해석해 이 때 누르하치가 2천여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오역을 한 경우라고 할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잘못된 번역을 했다는 것은 당시에 쓰인 '올지'가 무슨 의미로 쓰였는지 알면서도 누르하치의 당시의 전과를 과장, 윤색하기 위해 '(실제 인명포로를 포함한) 2천의 전리품'을 획득했다고 서술하기 보다, 올지의 다른 의미를 차용, '2천여명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번역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록상에서는 누르하치의 행적을 미화하거나 윤색하기 위한 몇 가지 작업들이 살펴지므로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듯 하다.
그렇다면 실제로 당시 누르하치가 획득한 인명포로나 가축등, 2천의 올지의 세부 사항은 어떠했을까. 확실한 신뢰성이 담보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선에서 파악한 해당 전역의 정보를 참고하는 방법이 있다.
1604년 건주에서 탈출한 조선인 출신 포로 임춘이 자신이 건주에서 보고 들은 바를 공술한 기록에 의하면 누르하치가 1604년에 여허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에 말과 소등의 전쟁 및 농경에 쓰일 가축 1백여두와 2백여명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한다. 이 공술을 누르하치의 당시 행적과 비교해보자면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하여 장과 아키란 두 성을 함락하고 7개의 부락을 점유한 대가로 1백여의 대형 가축, 2백여명의 인명포로를 획득한 것이다. 건주인의 진고가 아니라 포로로 잡혀 있던 이의 진고인데다 조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확실한 신뢰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이는 확실히 당시 누르하치가 확보한 인명포로와 가축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
해당 인명포로와 가축의 숫자를 도합하자면 3백여두인데, 청의 기록상에 언급된 당시 누르하치 원정군이 획득한 올지 2천 중 약 7분의 1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7분의 6, 즉슨 1천 7백여량의 노획물은 다른 노획품, 즉슨 가죽이나 면포, 그외 귀중품등의 물자라는 계산이 나온다.
2개의 성과 7개의 마을을 쳐서 점령했다는 것을 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전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허의 누르하치에 대한 방어 전략을 생각해 보자면 이는 아마도 여허가 해당 성과 마을들에서 병사들과 거주민들을 후퇴시킨 탓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9년 뒤인 1613년 음력 9월 누르하치가 4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여허를 공격했을 때에 여허는 누르하치의 공격 소식을 파악하고 누르하치의 예상 공격 진로상에 위치한 지역의 주민들과 병사들을 대부분 철수시켰다. 그나마 우수성에 전염병인 천연두가 퍼졌기에 해당 성의 암반과 병사, 백성들은 철수시키지 못했으며 그외 다른 지역에서도 일부 아녀자들을 철수시키지 못했을 뿐이었다.5
이 때와 마찬가지로 1603~4년에도 여허측이 누르하치의 공격 진로에 위치한 부대와 백성들을 미리 대부분 대피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철수할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큼의 병사들만 남겨 두어 누르하치를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2개의 성과 7개의 마을이 섭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가 생포한 포로의 수와 가축의 수, 그리고 그외의 노획물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 역시도 어느 정도 아귀가 맞게 된다.
무엇이 되었던 이 공격은 누르하치로서는 여허에 대한 의미있는 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때에 누르하치가 점령했던 점령지들은 대부분 이후 여허에게 수복된 것으로 판단된다. 예컨대 장의 경우 1613년 확실한 여허 소유의 요새였다. 아마도 누르하치가 먼저 해당 지역의 점령유지를 포기한 것으로 사료된다.
누르하치로서는 여허측의 군대와 백성이 대부분 철수하고 여허측이 소유하고 있던 물자 역시도 대부분 여허 내지로 수송된 마당에 점령 지역을 계속 점유하고 있어봐야 큰 의미가 없으리라 판단, 포로와 가축, 노획물만 확보하고 해당 지역의 유지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1.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4123351 참조
2. 『청태조고황제실록』 갑진년 음력 1월 8일
3. 『만주실록』갑진년 음력 1월 11일
4. 필자 역시 이전의 글에서 2천여인의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서술했었으나 이 글을 작성하기 전에 만문본과의 대조를 통하여 이를 수정한 바 있다.
5. 『만문노당』, 『만주실록』계축년 음력 9월.
저 만주족 놈들 패션센스는 진짜 봐도봐도 적응이 안되네 ! 어릴때부터 무협영화로 계속 봐왓는데도 너어무 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