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타지 소설가 할란 엘리슨이 쓴 단편
'버질 오덤과 동극에서'는
메데이아라는 행성에 거주하는 윌리엄 포그가
한 낯선 남자를 만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메데이아는 3개의 항성을 두고 있기에
시시각각 하늘빛이 바뀌고 생명체가 살기 힘든 '추운땅'과
생명이 서식하는 '더운땅'이 뒤섞인 곳이다.
윌리엄 포그는 이곳의 토착 생명체
'퍽스'들을 조사하고 그들과 텔레파시 대화를 시도하여
퍽스들의 지능과 의식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퍽스들에게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짝짓기나 사냥철, 좋은 보금자리에 대한 개념 정도다.
포그는 퍽스들의 의식수준과 지성, 심성을
끌어올려 그들에게 예술과 미적감각을
알려주고자 했지만 퍽스 사회는 애초에 예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낯선 남자를 발견한 포그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몇 일 재우고 먹을 것을 제공한다.
포그는 남자에게 대화를 시도하지만
남자는 기운을 회복한 후에도 포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며 그를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낯선 남자가 포그의 집에
온 이후부터 퍽스들이 먹을 것을 들고
포그의 집으로 찾아오고 남자와 교류하는 것을 보며
그에게 의심과 짜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들이고도
실패한 퍽스와의 교감을 낯선 남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낯선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포그가 집 안과 주변에 여기저기 놔둔
잡동사니와 고물들을 빼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포그는 남자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항의하고,
그에게 폭력을 쓰기도 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포그도 결국 그에게 질려버려 그러든 말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낯선 남자는 이따금 포그의 집을 떠나
다시 자신이 처음 건너온 '추운땅'으로
돌아가면 몇 개월이 지나서 찾아오기도 했다.
어느새 썰매까지 만든 낯선 남자는 하루는
둥근 관처럼 생긴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포그는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가 한참 뒤에야
그것이 메데이아의 궤도를 돌다가 추락한
인공위성의 레이저 조준기임을 깨달았다.
얼음과 눈을 녹여 사람이 살만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그 위성은
오래전 사고로 여기저기 추락한 뒤 잊혀졌다.
낯선 남자는 레이저를 몇 달 동안
두들기며 고치고 손을 보더니 오두막을 떠난 뒤로
한참을 보이지 않다가 방한복을 얻으러
잠깐 들른 것을 끝으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런 이후로 어느 순간부터 수백, 수천 마리의
퍽스들이 무리 지어 포그의 집을 지나
추운땅으로 향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우두머리 퍽스가
포그에게 텔레파시 이미지로 자신들과 함께
추운땅으로 건너가 낯선 남자를 만날 것을 제안했다.
포그는 자신이 왜 그 무례한 남자를
보러 가야 하냐며 화를 내고 거부했다.
갑자기 포그가 전혀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두머리 퍽스가 다른 퍽스에게서
나무 창을 빌리더니 땅바닥에
손을 잡은 두 인간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머리에서는 방사형으로 원이 퍼져나갔고
다시 두 남자를 크게 둘러싸는 원이
주위로 퍼지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포그가 이 곳에서 처음으로 본
퍽스들의 예술품이자, 회화였다.
자신의 노력으로 퍽스들이 드디어 예술을
이해했다는 기쁨에 그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추운땅으로 가는 길은 길고 험난했다.
아래에 뚫린 얼음 틈에 빠질 뻔하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몇 시간이고
땅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거대한 얼음산 리오델루즈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의 빛을 받아 봉화처럼
밝게 빛나는 리오델루즈는 등대와 같았고
퍽스들은 그곳으로 마구 달려나갔다.
윌리엄 포그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 봤다.
귀에 들리는 건 오직 자신의 한숨과
신음소리 뿐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메데이아 행성의 하늘을
때론 반사하고, 때론 흡수하는 그 얼음산은
천 가지의 색을 발하며 매순간 모양이 바뀌었다.
붉은 말들이 은빛 빛줄기를 따라 달려나가는 듯 하고,
얼음표면에 비치는 빛의 소용돌이에서 별들이
탄생했다가 다시 꺼지며 소멸하고,
호박색 광휘가 얼음 벽에 파편이 되어 부서지고,
무지개와 보석이 파도가 되어 봉우리에서 쏟아졌다.
포그는 어린 시절 이후로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들이 다시 자신의 안에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 자리에 윌리엄 포그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얼음산의 파장에 공명하는 도구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포그는 아주 오랜 시간 산을 보며 울었다.
그는 산을 보면서도 계속 그 산을 바라보고 싶었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포그는
퍽스들에게 이끌려 누군가의 시체 앞에 있었다.
크고 작은 퍽스들이 시체 주변에
모여 서서 또는 앉아서 손톱이나 창으로
눈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체 옆에는 레이저 조준기가 파묻혀 있었다.
그때 비로소 포그는 알았다.
낯선 남자가 추운땅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퍽스들이 포그에게 보내는 텔레파시가 느껴졌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지만 포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낯선 남자가 꿈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를 위해, 우리를 위해 마무리해달라."
"그가 끝내지 못한 과업을 완수해달라."
가장 어린 퍽스들마저도 그림을 끄적거리는
광경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포그는 다시 울고 있었다.
그것이 질투심인지, 먹먹함인지, 감동인지,
슬픔인지 그 자신도 구분할 수 없었다.
포그는 레이저 조준기를 몇 번 발로 건드려보고는
얼어붙은 피를 털어내고 어깨에 멨다.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제는 사람들이 행성과 우주 사방에서 몰려왔다.
요즘은 사람들이 그 얼음산을 '오덤의 그림'이라고 부른다.
그 남자의 이름은 버질 오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메데이아의 동극에 그가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 모두가 알게 되었다.
위 이야기는 한 남자의 실화에 감명을 받고
작가가 그에게 바친 소설이다.
사이먼 로디아는 1878년 이탈리아 세리노에서 태어나
15살에 자신의 형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펜실베이니아에서 광부로 일하던 형이 사고로 사망하자
사이먼은 시애틀 워싱턴으로 옮겨 1902년 결혼한다.
그는 3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7년 뒤 부인과
이혼하고 가족과도 헤어지면서
미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1920년, 캘리포니아 LA 와츠 지역에 정착하고
1921년부터 작은 부지를 얻어 땅을 다진 뒤
구조물들을 짓기 시작한다.
변변한 기술이나 자금이 없었던 그는
몇 km 떨어진 철로까지 걸어가
기차의 힘으로 철근을 구부린 후 가져오곤 했다.
시멘트는 자신이 직접 만들었으며,
철근 주위에 철사들을 감고 다시 겉에 시멘트를 발라
굳히는 식으로 탑을 지어 올렸다.
시멘트의 겉에는 여기저기서 주운 도자기 조각, 타일,
유리, 조개껍데기, 병 등을 붙여 장식했다.
사이먼은 낮에는 일을 해야 했기에 주로
늦은 밤이나 새벽, 주말과 공휴일에만 공사를 했다.
1921년부터 1954년까지 무려 33년간
쉬지 않고 자신의 상상대로 17개의 서로 이어진 탑을
건설했으며 그 중 가장 높은 건 30m에 이르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공사를 했지만 종종
주민들이 찾아와 공사 현장을 부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된데다
LA시와 탑의 안정성을 둘러싼 행정문제에 지쳐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친다.
1956년 7월, LA시는 건축물들을 허물려고 했지만
그의 사연을 알게 된 예술가, 건축가, 배우, 학자 등이
토지와 건물을 사들이고 보존 활동을 이어갔다.
1959년 10월 10일, 약 4,500kg의 무게를
견디는 LA시의 안전성 테스트를 통과함으로서
사이먼 로디아의 탑은 허가받게 된다.
그의 탑은 20세기 미국 이주노동자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건축과 조각에 녹여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0년에
미국 국립사적 기념물과 캘리포니아 역사유적지로 지정되었다.
시민들과 LA는 사이먼을 기리고자
'와츠타워 아트센터'를 설립해 주민과
방문자들 누구나 예술적 영감을 접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