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음력 4월 20일. 무순 파괴 작업을 수행하고 온 부대를 본대에 합류시킨 누르하치는 이후 군을 다시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리품, 포로와 함께 허투 알라로 선행해서 복귀시킨다. 해당 부대는 아민과 망굴타이, 두두등의 버일러들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다른 한 부대는 자신의 휘하에 남기어 혹시라도 존재할 지 모를 명군의 추격에 대비해 후방 지역에서 파수 임무를 수행케 했다. 이 부대에는 확실하게 대 버일러 다이샨과 두이치 버일러 홍타이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음력 4월 21일 오후 무렵으로 추정되는 시간까지도 명군의 추격군이 관측되지 않고 다른 이변 역시 일어나지 않자, 누르하치는 자신이 대동하고 있던 군대를 이끌고 본인 역시도 서서히 허투 알라로 회군하려 하였다. 물론 지금까지 명군이 추격해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방 경계에 소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부 초계부대를 국경1에 배치한 뒤 복귀로를 통해 허투 알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삽화 출처 : 칼부림
복귀를 결정한 뒤 20여리를 행군한 누르하치와 그의 부대는 후금령 내지에 다시 숙영지를 구축코자 했다. 염두에 둘 것은, 이 때 누르하치 산하 후금군의 전력은 대부분 기병들로 유추된다는 것이다. 병종 대부분이 기병으로 편성되어 있는 군대를 데리고 고작 20여리만을 움직이고 다시 숙영지를 구축코자 한 것은 무척이나 느린 움직임이라고 할 만 했다.
이를 보자면 누르하치는 일부러 느린 속도로 회군을 하면서 여전히 약간이나마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는 명군의 대응을 경계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허투 알라로 복귀한 뒤라서야 명군의 이동 정보를 파악하여 재출격을 하는 것보다야, 현장에서 즉시 대응하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건대 6일, 전투가 벌어졌던 15일 당일까지 포함하면 1주일간 명군의 지원군 소식을 파악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의 신중한 행동은 그와 후금의 입장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누르하치로부터 지시를 받아 그의 휘하 후금군이 숙영지를 건설하던 그 때에, 후방 경계 지역에 남겨둔 척후가 본대로 복귀했다. 해당 척후는 무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온 명군이 명/후금 국경 인근에 이르렀다는 정보를 상대적으로 후방에 있던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보고했다. 그것으로, 누르하치 휘하 후금군은 허투 알라로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 명군 추격대와 대치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당 명군은 요동총병 장승윤(張承胤)이 급하게 끌어모아온 요격부대였다. 장승윤은 지난 1615년서부터 누르하치, 그리고 그의 통치세력인 건주/후금과 악연이 있던 인물이었다. 1615년 음력 6월 누르하치로부터 개간지를 회수하고 파종한 곡식을 거두지 못하게 했던 것이 바로 그였다. 또한 장승윤이 총병직을 수행하던 때에 후금의 경쟁세력 여허의 수장층이 명과의 공조체제를 믿고 부양구의 여식을 옹기라트의 자이사이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기실 지난 1616년에 있었던 국경 문제 역시도, 비록 직접적 책임자는 당시 요동순무였던 이유한이었으나 장승윤이 요동총병으로 자리하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장승윤은 명과 여허간의 공조체제 강화와 명의 대건주 압박의 최일선에 선 인물이었다. 요컨대 누르하치와 당시 후금의 버일러들로서는 원한이 깊은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는 명군이 왔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전군에 전투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초계병을 누르하치에게 보내어 누르하치에게도 상황을 보고케 했다.
머지 않아 누르하치 역시 초계로부터 정보를 파악한 뒤 명군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는 명군이 요격을 위해 아군 본대 지척까지 접근해 왔으면서도 바로 국경을 넘어 물리적 충돌을 시도하지 않는 것, 요컨대 자신의 군대에 바로 접근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윽고 그는 해당 명군이 접근해 온 것이 자신들과 직접 교전하려는 생각이 없으며 자신들의 진퇴를 관전하다가 머지 않아 자신들이 퇴각하면 상부에 후금군을 격퇴했다고 보고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누르하치의 생각대로 장승윤은 누르하치의 군과 구태여 실제적으로 충돌치 않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무순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하게 군대를 끌어모아 움직인 탓에 여러 조건상 누르하치를 선공하여 맞붙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국경 인근까지만 누르하치를 추격하고 그들이 물러나면 그대로 회군코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술하겠으나, 장승윤이 국경을 넘어 누르하치에게 선공을 가하지 않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진을 구축한 것을 생각해 보자면 그는 국경 인근까지만 이동한 뒤 그 곳에 단단한 방어영을 세우고 후금군이 역공을 시도치 못하게끔 한 다음 후금군의 철수를 유도하게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 역시 굳이 장승윤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군을 둘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대를 허투 알라로 복귀시킨 탓에 산하 병력도 아주 많지는 않았던데다가, 명군이 국경을 넘어 진군해 오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물러나려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무순, 동주, 마근단에 대한 공격은 완벽히 성공을 거두었고 전리품과 포로도 두둑히 챙긴데다 화친을 종용하는 서신도 보낸만큼, 누르하치는 굳이 장승윤과 싸우지 않고 그대로 허투 알라로 귀환, 추이를 지켜보고자 했다.
결론을 내린 누르하치는 휘하에 종군하고 있던 문관, 어르더니 밬시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는 제1선에 나가 있던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자신의 장승윤의 의도에 대한 판단과 함께 전투 준비를 멈출 것을 전달하는 것이었다.2
(다이샨과 홍타이지, 칼부림 中. 이들은 정치적 라이벌임과 동시에 동지인 관계였다.)
그런데 제 1선에서 군병들과 함께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다이샨과 홍타이지는 어르더니 밬시로부터 누르하치의 명령을 전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회의적이었다.
두 사람 역시 누르하치와 마찬가지로 명군이 굳이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상황상 명군이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취할 것이라 여겼다. 후금군이 철수하기 전 까지 방어태세를 유지하거나 혹은 머지 않아 철수하리라는 것이 두 사람의 판단이었다.
누르하치의 판단과 일맥상통한 것이 두 사람의 예측이었지만, 두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고려한 가능성은 명군을 앞에 두고 군을 물릴 시 그들이 '자신들의 추격을 두려워하여 후금군이 퇴각했다.'고 선전하며 기고만장해질 가능성이었다. 그리 된다면 초반 무순 전투의 승리와 기선 제압 효과 역시 빛이 바래게 되며, 누르하치가 명에 보낸 화친의 제안 역시도 무시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
그렇기에 다이샨과 홍타이지 두 사람은 차라리 명군이 후금군의 진영 근처에 까지 이른 이상, 그들과 교전에 임하여 격파하고 그 승리를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1. 당시 명은 후금을 인정치 않고 있었으므로 후금의 입장에서만 국경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2. 이상 <만주실록>과 <만문노당> 천명 3년/무오년 음력 4월 21일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