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손녕이 등장하는 것 외에는 본문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 없다.)
993년, 거란의 동경유수 소항덕(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소항덕이 내세운 명분은 고구려의 강역 영유권을 소유하고 있는 거란에 대해 고려가 영토를 침식하고 있는 것, 고려의 거란에 대한 정식적인 관계 거부, 송과의 관계 형성등이었다.1
당시 거란은 전면적인 고려 정복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거란의 실제적인 목적은 고려의 항복을 통한 우열관계 확인, 조공-책봉 관계를 통한 실제적인 관계 안정, 안정된 관계를 모토로 한 국제관계에서의 고려 우군화, 거란과 고려 사이에 존재하는 돌출 세력- 여진에 대한 제압과 통제 등을 거론할 수 있다.2
스스로 자신이 통솔하는 군대를 '80만 대군'이라고 칭한 소항덕은 봉산군을 함락하고 급사중 윤서안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소항덕은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며 안융진을 공격하는 등 무력 시위를 펼쳤고, 그 결과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서희와 소항덕간 협상을 통한 강화, 강동 6주의 점유, 고려의 거란에 대한 책봉관계 수용등으로 이행되었다.
그런데 『요사』에는 이 1차 고려-거란 전쟁 이전의 '고려 정벌'이 존재한다. 요사 79권의 야율아몰리 열전과 88권의 소항덕 열전에 기술된 통화 원년(983년)의 '고려 정벌'이 바로 그 것이다. 야율아몰리 열전과 소항덕 열전에 의하면 983년 동로행군도통/남원선휘사 야율아몰리와 남면임아 소항덕이 고려를 정벌한 공을 세웠으며 그로서 야율아몰리는 북원선휘사로 위치가 바뀌고 관직에 중서령이 더해졌다. 또한 소항덕 역시도 남면임아에서 북면임아로 고치는 등 변혁이 존재했다.3
고려와 거란간의 국지적 마찰은 993년의 1차 고려-거란 전쟁 이전에도 분명 존재했다. 985년 송의 감찰어사 한국화가 사신으로 왔을 때 고려 성종의 언급에서 드러나듯 거란군은 여진 침공 과정 중에서 고려 영내를 침입하기도 했다.4 하지만 그것을 고려에 대한 정벌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엄밀히 말하여 거란과 고려의 대규모 전쟁은 993년의 1차 고려-거란 전쟁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983년에 고려를 정벌했다는 요사 열전의 기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그에 대한 의문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단순히 993년의 일이 10년전으로 오기된 것일까?
『요사』 「성종본기」를 살펴보면 이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다. 통화 원년(983) 10월 15일 요 성종은 동경유수 야율말지의 군대를 친히 점열하면서 고려에 대한 정벌 의지를 표명했다. 이를 통해 당시 거란이 고려에 대한 원정을 준비한 것이 확실시된다. 그와 거의 동시기이자 며칠 뒤인 10월 24일에 선휘사 야율아몰리와 남면임아 소항덕이 군대를 이끌고 동방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했다.5
이 기사를 본다면 야율아몰리와 소항덕이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술하는 기사는 이들이 공격한 대상이 고려가 아니라 여진 세력임을 알 수 있다. 통화 2년(984년) 2월 15일 야율아몰리가 보고키를 그는 '여진을 토벌하여 승리했다'고 하였다. 이어서 동해 4월 7일에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야율아몰리와 소항덕 두 사람에 대해 치하하며 야율아몰리에게 정사령을 더하였고 소항덕에게 신무위대장군을 제수하였으며 여러 하사품을 내렸다.6
즉 이를 살펴보자면 야율말지에 의해 감독된 원정 준비는 고려 원정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정황을 살펴보면 야율말지가 준비한 군대는 그대로 야율아몰리와 소항덕의 동정에 투입되었으며 야율아몰리와 소항덕은 이를 통해 여진을 토벌하고 돌아왔다고 살펴진다. 즉, 야율아몰리 열전과 소항덕 열전의 983년 고려 원정이란 실제로는 여진에 대한 원정이며, 그것이 열전에서 오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기의 원인은 「성종본기」의 표현 때문으로 보인다. 본기의 통화 원년 10월의 기사에 의하면 야율말지가 고려에 대한 원정을 준비함과 동시기에 야율아몰리와 소항덕이 출진을 했다. 그런데 이 때 10월의 기사에서는 '여진'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저 '동방'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고만 기술되었으므로, 통화 2년의 2월과 4월의 기사와 연계해서 상황을 살피지 않는다면 10월의 본기 기사서 언급된 '동방 토벌'을 고려 원정으로 볼 개연성이 충분하다. 이 때문에 열전의 서술에서 오류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983년에 거란이 고려에 대한 원정을 준비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 때에 해당 원정 준비가 고려에 대한 실제적인 원정으로 진행되진 않았다. 대신 동시기에 야율아몰리와 소항덕은 이 때 준비된 군대를 이끌고 동정을 떠나 여진을 공격하였고 그로서 일정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거란의 983년 여진 공격은 단순히 고려 원정이 사세상 불가능하게 되어 '꿩 대신 닭'이라 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거란측에서는 고려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 중 거란과 고려 사이의 완충적 존재이자 돌부리나 다름 없는 여진의 존재 탓으로라도 곧바로 고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 고려 원정에 선행하여 사전 정지작업으로서 여진세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제압코자 했던 것 같다.7
이유를 그것만으로 특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여진의 세력이 성장해 가는 와중에 그들이 반거란 활동을 억제하고 그로서 거란 내-번의 혼란한 상황을 안정화 하고자 했을 의도 역시도 존재했을 것이다.8
당시의 거란의 동방 원정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도통/선휘사였던 야율아몰리가 원정군을 총지휘하고 남면임아 소항덕이 이를 보조했다는 점, 황제가 직접 그들에게 원정을 칙유한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 원정군의 규모는 되려 1차 고려-거란 전쟁에 투입된 원정군 규모보다도 컸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983년에 고려-거란간 충돌은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이 때에 거란이 고려 원정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며, 그에 이어 동방 원정을 진행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해당 원정은 여진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거란은 고려에 대한 경계 전진 및 원정에 앞선 사전 정지 작업을 수행하고 더불어 여진계의 반거란 세력들을 압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고려사절요』 권2, 성종 12년 10월.
2.이러한 요인들은 아래와 같은 논문들을 통해 정리된다. 나영남, 2017, 「고려와 동・서여진의 관계」, 『역사학연구』 제67집, 호남사학회;이미지, 2012, 『고려시기 對거란 외교의 전개와 특징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허인욱, 2012, 『高麗ㆍ契丹의 압록강 지역 영토분쟁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정나영, 2023, 『高麗前期 對契丹 使行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최덕환, 2012,「993년 고려−거란 간 갈등 및 여진 문제」, 『역사와 현실』 94집, 한국역사연구회등
3.『요사』 권79 열전 9 야율아몰리 열전, 동서 권88 열전18 소항덕 열전.
4.『고려사절요』 권2, 성종 4년 5월.
5.『요사』 권 10 본기 10 성종본기 통화 원년 10월 24일(병오)
6..『요사』 앞과 같음, 통화 2년 2월 15일(ㅂㅅ), 4월 7일(정해)
7.박순우, 2020, 「遼代 ‘渤海人’ 정치체로서의 兀惹部 연구」, 『대동문화연구』 109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200쪽
8.나영남, 2017, 앞의 논문, 227쪽; 최덕환, 2012, 앞의 논문, 282~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