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체불 이야기.
오래 전 모 ㅈㅅ를 다닐 때 이야기임.
일이 힘들고 월급도 짜기는 했지만, 그 때 일자리가 구하기 힘든 시절이라 꾹꾹 참고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장이 직원들 모아놓고 이러는 거임.
"갑자기 자금 흐름이 안 좋아져서 이번 달 월급이 좀 늦어지게 됐다. 다음 달에 이자까지 쳐서 넣어줄 테니 좀 기다려줘. 괜찮지?"
되게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가볍게 얘기하더라고. 거기다 부장급들이 '그래, 이번 달만 좀 참자. 이자까지 준다고 하시잖아'라면서 분위기를 만들어서 어영부영 그렇게 넘어가더라고.
그런데 나랑 친한 선배가 나한테 그러더라.
"난 임금체불 신고할 건데, 같이 할래?"
선배가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당연히 경력도 더 많았는데, 자기가 전에 임금체불을 당한 적이 있다는 거임. 그래서 월급 밀리는 게 엄청 심각한 일이고, 그래서 사장이 진지하게 얘기하는 게 맞는 건데 너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 수상하다는 거지.
듣고 보니 선배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촉이 너무 안 좋았어. 내 촉이 필사적으로 '사장이 우릴 엿먹일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거든. 그리고 선배가 한 마디 더 해준 게 결정적이었음.
"임금체불 처리가 엄청 오래 걸려."
결국 선배와 나, 그리고 다른 선배 이렇게 세 명은 지방노동청에 신고하기로 결심함.
임금체불 신고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경찰에 신고하듯 바로 이뤄지지 않음. 선배 말대로 시간이 꽤 걸리는데, 우선 신고하면 담당자 배정하고, 그 담당자가 사실 확인하는 그 과정까지가 거진 한 달이 걸리거든. 우리 같은 경우 조금 더 빨랐는지 담당자가 연락을 해줬고, 통화를 몇 번 하면서 이런저런 자료 제출도 하고 그랬음.
오래지 않아 우리가 신고 했다는 게 사장 귀에도 들어갔음. 길길이 뛰면서 '배은망덕하다', '겨우 한 달을 못 기다리냐', '너희는 해고다'라고 난리를 치더라고. 그렇지만 선배는 차분하게 '월급 주시면 돼요'라고 대응했음. 거기다 월급도 안 주고 해고하면 그 자체로 사건이 더 커지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 해고 못한다고 얘기해주더라. 아무튼 회사 안에서도 우리 셋은 대놓고 따돌림 당했고, 회의 같은 데서도 안 부르더라. 어차피 신고하면서 돈은 받아도 이 회사는 떠날 생각이어서 큰 동요는 없었음. 그냥 나중에 문제 안 되게 꼬박꼬박 출근하고, 정해진 일하면서 틈틈이 구직만 알아봤지.
그리고 다음 달에 결국 밀린 월급도, 그 달 월급도 안 나왔음. 사장은 잠적했고.
회사는 난리가 나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여기저기 알아보고, 노동청에 신고하고 난리였음. 선배가 말했던 것도 이거였지. 어차피 회사가 망하는 건 정해진 일이고, 조금이라도 먼저 움직여야 그나마 돈을 빨리 받을 수 있다는 거.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고.
시간이 더 지나서 노동청 담당자, 그러니까 근로감독관이 연락을 해왔음. 사장 쪽에서 신고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고 싶어한다나. 생각 같아서는 두 달 월급에 이자에 위자료까지 신청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현실이니 그냥 밀린 두 달 월급에 이자 정도 받는 걸로 우리 세 사람은 결정했음. 그렇게 의견을 근로감독관에게 전달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방노동청 사무실로 나와달라고 하더라. 합의서 쓰고 돈 받는 거지.
우리 세 사람이 지방노동청에 찾아가는 날, 오랜만에 사장을 보는데 다른 회사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나 싶었음. 그런데 솔직히 그럴 의리까지는 안 생기더라. 따돌림 당했던 기억도 있고. 아무튼 그렇게, 지방노동청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사장은 없고 사장 부인이 있더라. ㅈㅅ답게 사장 부인도 회사에 자주 나와서 이거저거 시키는 바람에 얼굴을 알고 있었거든. 그리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어. 누군가 싶었는데, 사장 딸이더라고. 사장 부인이야 그렇다고 쳐도, 사장 딸이 대체 왜 여길 오나 싶었는데,
"이 분이 대표님이세요."
사장 딸이 사업자등록 상 대표였어. 그러니까 20대 초반의 여대생이 내가 다니던 회사의 대표이사였다는 얘기지. 나중에 선배에게 들어보니 아마 사장이 이전에도 사업하다가 말아먹었을 테고, 그래서 금융관계나 기타 이런 문제로 또 사업을 못 하니 딸 이름을 팔아 회사를 세운 거 같다더라. 아마 부인 이름을 먼저 썼을 텐데, 그것도 망해서 딸 이름까지 써먹은 거 같았고.
어쨌든 합의하기로 이미 얘기가 끝났으니 서류 내용 확인하는데 사장 딸이 이러는 거임.
"제 개인정보인데 안 쓰면 안 돼요?"
합의서에 자기 이름이랑 주민번호 들어간다고 그거 지워달라는 거야. 솔직히 아버지가 이름만 가져다 썼지, 딸에게 제대로 설명이나 해줬겠냐고. 사업은 커녕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안 해봤을 텐데.
근로감독관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그럼 합의 안 하실 거에요?'라고 얘기하니까 사장 부인이 '그냥 사인 해 어서!'라면서 딸에게 말하더라.
합의서 확인 끝나고, 우리 통장에 돈 들어오는 거 확인하고 나서 합의는 끝났음. 대충 '이 일로 다시 얘기하면 안 됨' 같은 거 다시 확인하고 사장 부인이랑 사장 딸이 먼저 나가게 하고, 우리는 좀 기다리다 나가라고 하더라. 뭐, 나가서 마주쳐봤자 좋은 인상은 아닐 테니 그럴만 했지.
우리끼리 고생 했다고 얘기하다가 몇 분 지나서 나갔는데, 아직도 사장 부인과 딸이 엘레베이터 앞에 있더라. 우리가 나온 거 몰랐는지, 좀 크게 딸이 엄마에게 얘기해서 다 들을 수 밖에 없었음.
"저 사람들한테 왜 돈을 주는데?"
"집에 가서 얘기해줄께."
"저 사람들 누군데? 왜 돈을 주는 건데?"
안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사장 부인이나 딸이 걸치고 있는 옷들이 죄다 비싼 거더라. 월급 밀리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돌아가던 회사였고, 그래서 사장 식구들은 딱히 아쉬운 거 없이 살았겠지. 월급 밀려서 사는 게 팍팍했던 우리는 그제서야 한 숨 돌렸는데, 저 집 사람들은 저 비싼 옷들을 걸치고 다녔구나 싶어서 씁쓸했음.
나중에 우리 세 사람이 밥 먹으면서 얘기하다가 보니 그 철모르던 사장 딸의 인생도 심하게 꼬이겠구나 싶었음. 우리야 세 사람 뿐이고 밀린 월급도 감당할만한 수준이라 합의를 했겠지만, 다른 회사 사람들에 이런저런 밀린 대금 생각하면 꼼짝없이 파산이거든. 이제까지 비싼 옷에 비싼 차 타고 살았지만 그것도 거기까지라는 얘기지.
어쨌든 오래 안 걸려서 셋 다 다시 일자리를 구했고, 세월도 많이 지나서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겠네. 다만 그 월급 밀렸을 때의 절박함은 잊혀지지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