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하위키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건데 이미 괴갤에 몇번 올라왔던 적이 있던 내용이더라구요 '-';
그렇지만 내용이 꽤나 흥미롭고 더운 여름날에 말 그대로 괴담이라는 단어에 딱 어울리는 것 같아 이렇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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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시기, 폐번치현 절차에 따라 일본 전국의 측량과 인구조사를 하던 때의 동북지방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과거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폐허로 변한 땅을 조사하던 한 공무원이 큰 나무의 밑동으로부터 대량의 인골과 함께 소의 머리와 흡사한 동물의 뼈를 발견했다. 공무원은 조사 대장에 인골의 수를 기록해 측량을 마치고 가장 가까운 남쪽의 마을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조사를 마친 공무원은, 숙박을 위해 숙소에 머무르는 도중 숙소의 주인에게 앞서 인골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숙소의 주인은 "관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라며 운을 뗀 뒤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도 막부 말기(19세기 초). 텐포(天保/てんぽう) 3년(1832년. "텐포"는 연호)부터 일본에는 수년에 걸쳐 엄청난 대기근이 덮쳤다. 그 유명한 에도 말기의 '텐포 대기근'이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쓰러진 말에 이빨을 박고 날고기를 먹으며, 굶주려 쓰러진 시체를 들개나 새가 와서 뜯어먹는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비정하게 음식을 서로 빼앗아 그야말로 축생만도 못한 상황이다" 라고 적힌 비참한 상황이었다.
텐포 4년(1833년)의 가을 어느 깊은 밤, 이 남쪽 마을을 한 외지인이 찾았다. 휘청휘청 걷는 그의 몸뚱이는 사람이었으되, 머리는 그야말로 소와 같았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다가가 붙잡으려 하는 그때, 낫과 곡괭이 등을 손에 쥔 이웃마을 사람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나타났다. 그들은 공포 분위기를 잔뜩 조성하며 "소몰이 축제는 어디에도 발설하지 마라." 그들은 저마다 이렇게 외치며 그 외지인을 붙잡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날이 밝자 마을 곳곳에 그 이야기가 퍼져 나갔지만 아무도 이웃마을까지 확인하러 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 해, 그 이웃마을을 다녀온 사람이 "벌써 그곳에 사람이나 가축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이후 이들은 오랫동안 그 사라진 이웃마을을 '소의 마을'이라 불렀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이름조차 부르는 사람도 없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숙소의 주인은 이야기를 마치고 허겁지겁 뒤처리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공무원은 이 이상한 이야기에 대해 즉각적인 해석은 보류하기로 했다. 그는 다시 관청으로 돌아와 조사 대장을 마무리할 즈음에 이 이야기를 떠올리고, 친밀한 선배에게 해석을 요청했다. 선배는 에도 말기 텐포 연간의 주민 대장을 조사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대기근 당시엔 굶어 죽은 사람을 가족들이 식량으로 삼아 먹었던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을에서는 시체뿐 아니라 약한 사람을 잡아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면하고자, 그 의식을 '소몰이 축제'라고 칭해 소의 머리 가죽을 씌워놓고 잡아 죽인 것은 아닐까? 당시 그 폐허에서 헤아린 인골의 수를 따져보면 거의 마을 주민 전원에 해당한다. 소의 뼈 역시 마을에서 길렀을 가축의 수와 일치한다. 기근의 비참함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어쩌면 주민은 물론 친형제와 부부 간에도 수라와 같은 지경이 되어 이미 사람이라고는 칭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 또한, 이런 사실은 외부의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기에, 마을은 계속 고립 속에서 황폐해져 남쪽 마을을 포함한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으리라.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함은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일은 묻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
선배의 말을 깊이 받아들인 공무원은, 이후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고 속으로만 묻어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러일전쟁 시기. 고령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그 남자는 전란의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손주들을 불러모아 무심코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손자 중 한 사람이 이후 뒤늦게 진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실은 아무 관계가 없다던 그 남쪽 마을 사람들이, 이웃마을 사람 전원을 "소몰이 축제"라 칭하며 한꺼번에 잡아먹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뼈를 누가 어떻게 묻었겠는가…!
그렇게 소의 목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저주의 단서가 붙었다.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않고 내용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소의 목 이야기를 알고 있다.
무언가의 본질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그 자체에 영혼이 깃들어 점차 사람들 사이로 영향을 끼쳐나가기 때문이다.
- 에도 4대 기근은 일본 에도 시대에 이상기후, 해충, 자연재해 등으로 흉작이 연이어져 발생한 기근 중 그 규모가 매우 컸던 네 차례의 기근 중 하나이다. 에도 시대는 소빙하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전반적으로 한랭하여 냉해 등으로 흉작과 기근이 빈발했다. 4대 기근은 다음과 같다. 간에이 대기근(1642년 ~ 1643년), 교호 대기근(1732년), 텐메이 대기근(1782년 ~ 1787년), 덴포 대기근(1833년 ~ 1839년)
- 주 무대인 텐포 연간은 일본뿐 아니라 조선, 청 등 동아시아 3국의 사정이 모두 흉흉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 조선은 세도정치에 따른 삼정의 문란에 기근까지 더해져 농민 봉기가 빈발했으며, 청은 기근으로 서민들이 굶어 죽는 와중에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이 터졌다. 따라서 사실상 세 나라 모두 막장이나 다름없던 고난의 시기였고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인 아일랜드에서도 200만 명이 죽어나가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 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 맞춰보면 정말 믿거나 말거나…
있는데요? 있잖아요? 벌로 님을 잡아먹겠습니다
아는건 없는데 인육 먹는다니까 발끈해서 한마디라도 해야겠고 ㅋㅋㅋ 아주 멋집니다그려. 죄수씨.
실록에 기근으로 인육 먹었다는 기록이 왜 없습니까? 있어요. 실록에 그런 기록없다는 거짓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선은 기근때 그냥 죽었습니까? 인육 먹었습니다. 오바하지 마세요
경신 대기근때 식인에 관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오는데... 아니 근데 사대부도 굶는 마당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유독 한반도에서만 식인이 없을거라는 근거가 뭐죠? 우크라이나 아일랜드 중국 일본 이런 나라들은 미개해서 그랬나
4대 기근보다 먼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본 애니 '아수라'를 보시면 상황이 어떤지 잘 나타납니다.
기근이 일어난곳에서 인육 섭취는 뭐.. 세계 공통적인 일이였죠.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였고요 가장 최근의 예는 중국의 60년대 대기근때가 있겠네요..
경신 대기근때 식인에 관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오는데... 아니 근데 사대부도 굶는 마당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유독 한반도에서만 식인이 없을거라는 근거가 뭐죠? 우크라이나 아일랜드 중국 일본 이런 나라들은 미개해서 그랬나
실록에 기근으로 인육 먹었다는 기록이 왜 없습니까? 있어요. 실록에 그런 기록없다는 거짓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선은 기근때 그냥 죽었습니까? 인육 먹었습니다. 오바하지 마세요
거 뭐냐 북한에도 굶주림때문에 인육을 먹었다는 얘기가 있지 않았나요? 카더라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조 39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6월 24일(정미) 3번째기사 선전관 조안방이 도원수 진영에 다녀 오면서 목격한 참상을 서계하다 선전관 조안방(趙安邦)이 서계하였다. “신이 정월 11일에 품첩(稟帖)을 갖고 제독에게 가서 문안한 후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진으로 달려가서 군량과 군인의 수를 조사하려 하였는데, 요사이 빗물이 계속 불어나 도로가 5일 동안 불통하였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서 비변사의 공문을 화살에 묶어 쏘아서 도원수가 있는 곳에 전달하였더니, 군인의 수는 도원수도 상세히 알지 못하므로 뒤에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신은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이 있는 곳과 우도(右道) 함안(咸安)의 여러 장수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 갔습니다. 대체로 각처에는 군량이 공급되지 않아 사졸이 모두 굶주린 기색이 있었는데, 5∼6홉의 쌀로 죽을 끓여 두 사람이 나누어 먹으면서 날을 보내는가 하면, 심한 곳은 혹 4∼5일, 혹은 6∼7일을 굶고 앉아 있었으며, 도망하는 군졸이 매일 1백여 명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모두 함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6∼7백 리 밖에서 군량을 운반했으나 물로 인하여 길이 막혀 군영 앞까지 운반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또 경성에서부터 밀양에 이르기까지 쑥만 수북히 들을 덮었고 보이는 곳마다 인적은 없었으며, 적이 있던 진루(陣壘)에는 곳곳마다 백골만이 쌓여 있었고, 굶주린 백성들은 땅에 즐비하게 누워있거나, 서로 잡아 먹거나 하는 그 모습은 눈으로 보기에 너무도 참혹하였습니다. 군인의 수와 군량은 대략 별록(別錄)에 기록하여 아룁니다.”
... “만일 화전(火箭)을 쏘게 되면 타버릴 것이 틀림없는데 이 제도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화전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돌진하여 와서 도끼로 찍는다면 이 점은 우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八莒)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농사가 어떠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만경(萬頃)·옥구(沃溝) 같은 바닷가의 경우는 물에 잠겨 흉년이 들었으나 다른 곳은 그리 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을 조처할 수가 없게 되면 결단코 일을 할 수 없는 형세가 되고 만다. 전라도의 민간인 가운데 곡식을 저축해 둔 자가 있던가?” 하니, 아뢰기를, “민간에게서 1만여 석을 수득(搜得)하였는데 이 곡식을 실어다가 구황(救荒)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말하기를 좌상이 위력으로 민간인의 곡식을 취탈했다고 하던데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다. 만약 적이 들이닥치면 그들도 그 곡식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복호(復戶)2256) 에 대한 일은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이 없으니 덕을 입을 리가 없고, 영직(影職)2257) 또한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 실직을 제수하여 그들을 기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농사에 힘써 군량을 보급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하는 말은 바로 좌상이 정한 사목(事目)에 들어 있는 일이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 선조 46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3일(임자) 1번째기사 좌의정 윤두수를 불러 왜군의 동태·군사 징병 방법·농사 상황 등을 물어보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7일(병1신이게 왜 금칙어야) 1번째기사 기근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일을 엄금할 것을 명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屠殺)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도성 안에 이와 같은 경악스런 변이 있는데도 형조에서는 무뢰(無賴)한 기민(飢民)이라 하여 전혀 체포하거나 금하지 않고 있으며 발각되어 체포된 자도 또한 엄히 다스리지 않고 있습니다.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고,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하여금 협동하여 단속해서 일체 통렬히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10권, 9년(1576 병자 / 명 만력(萬曆) 4년) 6월 26일(정해) 1번째기사 간담이 창질에 효과가 있다는 낭설로 사람들이 죽자,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게 하다 전교하였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공사로 만들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경연관의 아룀에 의한 것이다. 이 때 경외의 사람들이 인육(人肉)과 사람의 간담(肝膽)을 창질(瘡疾)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소아(小兒)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었는데, 이는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의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이다.
숙종 30권, 22년(1696 병자 / 청 강희(康熙) 35년) 2월 5일(신묘) 1번째기사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이 인육을 먹었으나 실성한 것이므로 사형을 감면하다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李於屯)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는데, 임금이 그것이 몹시 굶주려서 실성하였기 때문이라 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58권, 19년(1743 계해 / 청 건륭(乾隆) 8년) 11월 23일(임인) 5번째기사 절개를 위해 살인한 자는 용서하고, 굶주려 살인 후 식육한 자는 삼복을 기다리게 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황주(黃州)의 양가녀(良家女) 김자근련(金者斤連)은 나이 20세가 되도록 출가(出嫁)하지 않았는데, 그 이웃 사람이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여 그 부모에게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웃 사람은 원래 완패(頑悖)한 자로서 처녀의 집에 몰래 들어가 겁간(劫奸)하고자 하였으나 처녀가 큰 소리로 외쳐 모면하였는데, 그 이웃 사람이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그 처녀와 간통(姦通)했으니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없다.’고 하였다. 처녀가 그 소문을 듣고 억울하여 분통하여 스스로 월파루(月波樓)의 절벽 아래에 투신(投身)하였으나, 남의 구원을 얻어 회생(回生)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저들은 친족이 번성하지만 나는 몹시 잔약하여 마침내 그 수욕(羞辱)을 받을 것이니, 차라리 한 칼로 같이 죽어 흔쾌히 억울함을 씻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남장(男裝)하여 칼을 품고 새벽에 이웃 사람의 집을 찾아가 그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잡혀서 관가(官家)에 나아갔다. 도신이 그 정상을 계문하니, 임금이 친히 판부(判付)하기를, “살인(殺人)에 대해 상명(償命)10346) 하는 것이 비록 법문(法文)에 실려 있으나, 절개를 세워 세상을 권장함은 왕자(王者)의 도리이니,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천(信川)에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먹은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가엾게 여겨 말하기를, “한 사람이 살 바를 얻지 못하더라도 왕자(王者)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 먹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하고, 죽여야 마땅한지 그 여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 고기를 먹은 자는 법에 있어서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정상이 비록 불쌍하나 법에 있어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선 삼복(三覆)을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있는데요? 있잖아요? 벌로 님을 잡아먹겠습니다
아는건 없는데 인육 먹는다니까 발끈해서 한마디라도 해야겠고 ㅋㅋㅋ 아주 멋집니다그려. 죄수씨.
웰던, 미디엄, 레어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4대 기근보다 먼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본 애니 '아수라'를 보시면 상황이 어떤지 잘 나타납니다.
위키복붙이 되던가...
아 근데 이거 소의 목이 원래 엄청 무서운 얘기인데 아무도 들은적이 없다는 나폴리탄류의 괴담 원조 아닌가요?
저 역시 나폴리탄으로 알고 있어요 . ^^;; 잊을만 하면 한번씩 올라오네요~
그 이야기가.. 소의 목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야기에서 다 죽었는데 글쓴이는 어떻게 그 이야기를 쓰는가가 공포였던 걸로 아네요(유령?)
제가 아는 소의 목 이야기도 나폴리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