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들의 해결되지 않는 딜레마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우울증은 육아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감당해야 하는 고달픔보다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지속하고 싶었던 직장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던 상실감에서 기인하는 면이 더 크다고 보인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우울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시되는 바가 없지만 영화에서 김지영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그녀가 자라온 성장 환경이 큰 몫을 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여성은 결혼, 출산을 하면서 누군가의 아내 또는 엄마로 살아가게 되고 딸보다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더 큰 부감을 느끼고 더 잘하려고 애쓰면서 가정을 이끌어간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삶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그녀를 '지영'이라고 불러주지 않게 되며 그녀는 그저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딸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김지영의 우울증은 여기에서 근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 '김지영'의 부재였다. 하지만 '바링허우'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들은 우선 외관상으로나마 '82년생 김지영'이 원했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들은 '82년 김지영'이 맞닥뜨렸던 고민과는 전혀 다른 문제 앞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애써 내면의 평형을 유지하지만 그 괴로움은 이른바 '독박 육아'에서 오는 괴로움과는 또 다른 차원의, 하지만 그 고민의 무게에 있어서는 경중을 가리기 어려운 항상적인 당면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김지영'들이 행복한 사회는 과연 언제쯤 오게 될까?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의 우울증이 호전되는 양상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또는 현재 노력해서 이루어가는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어 작은 위안이 된다.
공산주의사회에서 김지영을 외치고있네 스고이;;
공산주의사회에서 김지영을 외치고있네 스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