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선조 28년~29년/을미년~ㅂㅅ년에 있었던 신충일의 대(對)건주 외교 임무에 관한 기록인 건주기정도기/그리고 실록에 실린 그와 일맥상통한 보고문에는 당시 건주와 다른 여진 세력, 그리고 몽골계 세력의 여러 인물들이 거론되고 있다. 물론 해당 인물들의 기술에 대해 여진식과 몽골식의 발음이 그대로 유지되진 않았으며 대부분 한문으로 적당히 음역되어 서술되었다. 예컨대, 당시 건주에 억류되어 있던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는 부자태(夫者太)로 기술되었다.
더불어 일부 인물들의 경우에는 한자로 표기된 이름이 실제의 이름과 그 차이가 상당히 크게 나는 지라 그 실제 정체를 유추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다. 특히 코르친 우익의 수장 웅가다이 혹은 그 아들 오오바로 추정되는 '몽고왕 나팔'같은 인물은 그 위치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한자로 표기된 이름이 본래의 이름과 꽤 차이가 나는지라 실제의 인명을 추정하기가 힘들었다.
어쨌건, 그러한 많은 인물들 중에는 '초기(椒箕)'라고 기술된 인물도 있었다. 해당 인물의 정확한 정체는 확실치 않으나 여진의 추장급 인물중 한 명이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해당 인물은 동호라후(童好羅厚), 동망자합(童亡自哈)이라는 이들과 함께 퍼 알라에 묵고 있던 신충일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면서 신충일에게 이는 누르하치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1
여기서 언급된 초기는 유의를 할 만한 인물이다. 기록상에서 그는 여추(女酋)라고 서술되기 때문이다. 이 여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가 갈린다.
첫 번째 해석법은 여허의 추장(중 한 명)이라는 것이며, 두번째 해석법은 여성 추장이라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해석의 경우
1.당시 여허가 건주를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상실한 점
2.조선에서 여허의 추장을 서술할 때에 한자 계집 여를 빌려서 여추(女酋)라고도 서술할 수 있는 점
3.당시가 새해로서 다른 여진 세력이나 몽골계 세력에서 사신들이 찾아와 누르하치에게 예물을 건넸다는 점
4.해당 시기에 여허 역시도 예물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점
등이 판단의 근거가 된다. 이에 따르면 초기는 여허가 파견한 사신으로서 나림불루 혹은 부양구의 산하 지휘관 혹은 문관(밬시 baksi)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허의 추장이, 자신의 본래 거주지도 아니고 자신이 파견된 건주의 퍼 알라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신충일에게 연회를 베풀어주며 해당 연회를 누르하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존재한다.
물론 누르하치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에게 사신으로 파견온 여허의 추장에게 조선의 사신들을 대접하라고 강력히 요구했고 초기가 이에 억지로 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파견온 사신에게 또 다른 이국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는 것은 누르하치가 요구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초기 역시 받아들일만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생각된다. 뭣보다 초기와 함께 신충일을 대접한 동호라후와 동망자합은 모두 건주에 내속된 추장으로 판단되는데 초기 혼자만이 여허의 추장이었다는 것은 의아하다.
이에 따라 두 번째 해석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초기가 건주의 추장이면서 동시에 여성 추장이었다는 것이다.
1.여추(女酋)는 여허의 추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여성 추장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용례가 더 보편적이라는 점
2.초기와 함께 신충일을 대접했던 동호라후와 동망자합이 모두 건주의 추장이었고 그에 따라 그들과 함께한 초기 역시 여허의 추장이기보다는 건주의 추장일 가능성이 더 높으며 그렇다면 초기를 지칭할 때 쓰인 '여추'가 여성 추장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3.건주 퍼 알라에서 조선의 사신을 대접했다면 다른 세력의 추장이 아니라 건주의 추장으로 누르하치의 수하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에 따라 초기를 지칭할 때 쓰인 '여추'가 여성 추장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4.건주기정도기에 초기가 신충일이 퍼 알라로 향하는 노정에 존재하던 부락의 추장인 것으로 기술되는데, 이럴 경우 지리상 여허의 추장일 가능성은 더욱 더 떨어진다는 점
5.여허 세력의 한자 표기용례인女許의 실제 사용례가 다른 표기용례에 비해 그 빈도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한 점등으로 말미암은 해석이다.
건주기정도기에서 초기가 신충일이 퍼 알라로 향하는 노정에 존재하던 부락의 추장으로 기술된다는 점은 그가 여허의 부족장 중 한 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초기는 잉 부락의 추장이었던 것으로 살펴지는데, 그것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초기가 여허의 부족장 중 한 명일 가능성은 무척이나 적어진다. 여허 본토와 초기가 다스리는 부락간 거리가 상당해 지고, 또 중간에 두 집단을 차단하는 세력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신충일의 기록에서 보이는 여허의 사용례에서 여허(女許)라는 사용례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주요한 관건이다.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충일의 보고문에서 여허(女許)가 발견되지만 이는 오기로서 실제 원문을 살펴보자면 해당 기술에서 쓰인 한자는 계집 녀(女)가 아니라 같을 여(如)자이다. 즉, 신충일의 보고문에는 여허(女許)라는 용례가 없다. 그렇다고 다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여허(女許)의 용례가 많이 쓰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예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2 汝許, 如許, 餘許같은 사용례가 훨씬 경우가 많다.
이런 근거들을 살펴 보건대 신충일은 '여허 추장'이라는 의미로 초기를 '여추(女許)'라고 칭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여성 추장이라는 의미로 '여추'라는 단어를 쓴 것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결론적으로, 초기에 대해서는 여허의 추장, 또는 여성 추장이라는 두 가지 추정이 존재할 수 있으나, 모든 가능성을 종합해 볼 때에 그는 여허의 추장이 아니라 건주에 내속된 여성 추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른 한 편으로 여진족 부락이 여성들에 의해 통치될 수 있었음을 알려주는 근거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한다.
1.신충일, 『건주기정도기』 ㅂㅅ년 음력 1월 3일,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2.예컨대 『광해군일기』에서 여허(女許)의 사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광해군일기』10년 음력 5월 29일, 撫順鎭將, 則乞降生擒, 我將有末女許嫁, 時在奴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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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가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나라 초기 황실에 황족도 아닌 몽골여인이 있었다던데, 소말아(蘇麻剌)였나...비슷한 케이스 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