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3년 음력 9월 누르하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여허의 버일러 나림불루와 부자이를 위시로 한 9개 세력 연합군이 자신의 건주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구성하고, 퍼 알라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우선 적의 진군 방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건주는 9개의 세력에게 포위된 형국이었기 때문에 대 건주 연합군의 진군로는 특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적과 싸우려고 해도 적의 위치와 이동경로는 특정해야 하는 법이었기에, 누르하치는 9부 연합군1의 진군 방향과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 정찰병을 파견했다.
누르하치에 의해 정찰기수로 뽑힌 '우리칸'이라는 기수는 처음에는 동쪽으로 파견되어 상황을 살폈다. 누르하치가 처음에 우리칸을 동쪽으로 파견한 이유는 이전에도 한 차례 그쪽 방향으로 공격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칸은 동쪽으로 1백여리 이상 전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때 까마귀들이 우리칸의 앞길을 몇 차례고 막았고, 우리칸은 그것을 신묘히 여겨 퍼 알라로 복귀하여 상황을 보고했다. 누르하치 역시 이 까마귀들의 이상행동을 계시로 여기고 우리칸을 다른 방향으로 파견했다.
이번에는 혼하 방향으로 파견된 우리칸은 그 날 저녁 혼하 북쪽에 9부 연합군의 대영이 건설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고 비로소 적의 방향을 특정할 수 있었다.2
사료상에서는 이러한 정찰병으로 거론된 것이 '우리칸' 한 명 뿐이었지만, 실제로는 다방면으로 여러 명의 정찰병을 파견한 것으로 추론된다. 한 명의 정찰병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기에는 탐색해야 하는 방향과 지역이 너무 광범위했으므로, 누르하치는 필히 꽤 많은 정찰병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3 또한 각각의 정찰병들을 홀로 보낸 것도 아닐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찰병이 혹여라도 적의 파수부대와 조우, 발각당하고 그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여 현장에서 전사해 버린다면 정찰 결과를 파악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각각의 방향으로 파견된 정찰병들은 최소 1 명 이상의 우군과 동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실록상의 기사만 살펴본다면 우리칸 혼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파악하기가 쉽다. 하지만 실제로 관련 사료의 우리칸의 정찰에 관한 삽화를 살펴 보자면 우리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인물이 있었다.
(<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9월 삽화. 까마귀들에 의해 정찰활동에 방해를 받는 우리칸)
삽화를 기반으로 추론해 보자면 우리칸은 혼자서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 2인 1조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보자면 다른 방향으로 투입된 정찰병들 역시도 2인 1조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칸을 비롯해 임무에 투입된 정찰병과 함께한 호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정찰병을 호위하는 동시에 유사시 정찰병을 지키거나 혹은 정찰병 대신 퍼 알라에 정찰보고를 올리기 위해 동행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2인 1조식 편성으로 말미암아 정찰병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구축한 것이다.
여기서 정찰병에게 고작 1명의 호위만을 붙인 것에 대해 정찰병의 안전이 여전히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건주는 여력이 그리 없었기에 다수의 호위와 정찰병들로 구성된 정찰 부대를 여럿 편성하기가 곤란했다는 점, 지역 자체가 건주의 본토였기에 건주측 정찰병들의 안마당이나 다름 없고 그렇기에 정찰병들의 기동이 용이한 점, 오히려 너무 많은 숫자로 구성된 부대는 9부 연합군의 본대에 접근하여 정보를 수집하려다가 파수병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등을 고려해 보자면 누르하치의 조치는 이해하지 못할 조치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칸이나 다른 정찰병들의 호위를 맡은 것은 일반적인 정규 갑병이 아니라 쿠툴러(kutule)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정규 군병들을 보조하며 여러 잡무를 도맡는 시종병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1명의 정찰병(우리칸)에게 1대1로 붙어서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 당시 우리칸과 함께 한 인물이 우리칸과 동급의 인물이었다면 우리칸 뿐만이 아니라 함께한 정찰병의 이름도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우리칸과 함께 한 인물은 우리칸보다 급이 부족한 시종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사료된다.
정찰병들의 호위가 쿠툴러라고 가정한다면 한 가지 가정을 덧붙일 수 있는데, 단순히 정찰병을 지키거나 임무를 대행할 뿐 아니라 쿠툴러의 성격에 맞게 임무중에 발생하는 잡무들 역시도 처리했을 것으로 보인다.4
앞서 서술했듯이, 우리칸은 본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적에게 발각당하여 교전하거나 하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는데에 성공했다. 이 이후 우리칸과 그의 시종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후금의 사료에 언급되는 우리칸은 몇 있지만, 그 우리칸이 이 때활약한 '그' 우리칸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높은 공적을 세웠으므로 후금이 건국된 뒤 까지 생존했다면 도중에 별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지휘관급에 인선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해당 연합군의 명칭은 사료와 서술자에 따라 여러가지로 지칭할 수 있으나 본글에서는 9부 연합군으로 서술한다.
2.청의 사료는 이러한 일을 하늘이 누르하치를 도왔다는 근거로 삼지만, 이전에 필자가 작성한 '만주족의 까마귀와 까치'라는 글에서 한 차례 언급했듯이 위의 이야기를 정말로 '신의 도움'으로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다. 다만 당시 여진족의 샤머니즘적 풍습과 그에 따른 사회문화적 인식에 따라 우리칸이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까마귀들의 행동을 '신앙적 계시'로 판단하고서는 그것을 누르하치에게 보고했으며, 누르하치 역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사회문화적 인식에 따라 그러한 이야기를 '계시'로 납득하고 우리칸을 다른 방향으로 파견 보냈다는 것이 보다 사실적인 이야기이다.
3. 사료상에서는 건주측 정찰병으로 거론된 것이 오직 '우리칸' 한 명 뿐인데, 실제로는 여러 정찰병들을 뽑아 각 방향으로 파견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다만 사료상에서 우리칸만이 언급된 것은 우리칸이 위와 같은 '기록에 남길 가치가 있는' 신묘한 일을 겪었고 그 뒤에 적의 군대를 발견했기 때문에 다른 정찰병들의 행적은 생략하고 그에게 비중을 몰아준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되다보니 누르하치의 전략적 역량이 오히려 떨어져 보이는 효과가 일어났으나, 당시로서는 '하늘이 군주를 돕는'것을 군주 스스로 뛰어난 것보다도 고평가한 탓에 이러한 서술이 문제 없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4.쿠툴러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36~242쪽;소찬영, 2010, 「入關前 淸朝의 經濟的 狀況 - 崇德 年間의 掠奪戰과 奴僕
(aha) 계층을 中心으로」, 『서울大 東洋史學科 論集』 34집, 서울大 東洋史學科 論集, 169쪽 참조.
청의 사료들은 뭔가 조선의 용비어천가에 더 가깝다는 인상이 들긴 하네. 약간 몽골비사랑 비슷한 감성도 느껴지고.
초기 행적에 저런 신비적인 모습이 많이 보이고 본격적으로 세력이 성장해서 조선, 명간 외교를 하는 통에 교차검증이 되는 시대로 오면 많이 줄어듬. 그럼에도 누르하치 기습숭배는 간혹 보이지만.
그럴수 밖에 없는게, 사료 잘못쓰면 3대가 죽을수 있었거든. 문자의 옥. 이라고 아주그냥 조선만큼 사관이 자유롭게 기록한게 정말 없어
문자의 옥과 관련 없음.
그런가~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기록이나 국가적이벤트 때 기록을 보면 새떼, 구름, 비 신묘한표현 이런거 잘들어가긴 하더라.
순간 우라칸으로 보고 화들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