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본기 외에 열전이 따로 있습니다. 신당서 동이전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삼국사기의 열전은 신당서의 열전을 베껴 온 것 같습니다. 내용이 거의 같거든요... 이 글에서는 가급적 본기 기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볼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평로치청의 난에 대해 기술한 적이 있습니다. 안사의 난이 터졌을 때, 반란군 속에서 이정기(당시엔 이회옥) 등이 반란을 다시 일으켜 산동 지역을 조정의 이름으로 탈환해 주었다는 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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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로치청의 난을 이정기가 반란을 일으켰던 시점부터 생각하면 781년부터 819년까지 지속됩니다. 그 중 평로치청절도사는 이정기에서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바뀝니다. 긴 시간입니다.
한편 장보고가 청해에 진을 만든 것은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828년 4월입니다.
夏四月, 清海大使弓福, 姓張氏, 入唐徐州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 鎮清海.(흥덕왕, 828)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장보고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다고 했고, 위의 흥덕왕본기에서는 탁발부의 서주에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열전에도 장보고가 언제 탁발부에 들어갔는지, 무슨 공로로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서주의 위치는 바로 치주와 청주, 즉 산동의 바로 아래이고, 무령군은 서주절도사 막하의 군대라고 하니, 시기상 장보고가 소장으로 출세하게 된 배경에는 평로치청의 난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장보고가 평로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제가 모르는 사료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모르겠네요. 이정기가 고구려계이므로 평로치청의 난을 고구려와 엮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신라인이 이를 진압함에 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역설적입니다.
한편, 흥덕왕본기에는 청해진이 만들어질 때,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이유는 삼국사기의 열전과 신당서에 나와 있습니다.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鎮清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清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㠀.(삼국사기 열전 4)
后保皋歸新羅,謁其王曰:“遍中國以新羅人為奴婢,願得鎮清海,使賊不得掠人西去。”清海,海路之要也。王與保皋萬人守之。(신당서 열전 145)
대체로, 중국에 신라인들이 잡혀와 노비가 되니, 청해에 군진을 두어 이를 막겠다는 말입니다. 이에 흥덕왕은 병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주둔하게 했으니, 청해는 지금의 완도입니다. 청해진을 두자 신라인들이 잡혀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 때 특채 공무원들은 일을 빨리빨리 잘 처리한 것 같습니다.
장보고가 청해진에 주둔한 사건은 돌이켜 볼 가치가 있습니다. 어릴 때야 그냥 장보고가 위대한 장군이라서 해적들을 잡아 죽였구나 했지만, 크고 나서 생각해 볼 때 석연치 않은 점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