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시티에서의 대규모 소탕 작전의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패러사이트 퓨저너의 감염을 피할 수 있었던 샤키르 나셸은 살아남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기회는 다시 온다는 식으로 그 혼란을 틈 타 루나 시티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자 했었다. 비록 예상치 못 했던 온갖 나쁜 변수들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상당히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가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샤키르는 일단 자신만이 아는 별장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으음... 이거 곤란하군..."
그러나 자신의 별장으로 온 이후로도 샤키르에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암흑 날개의 인적 자원은 모두 고갈되었고, 자금도 더 이상 충당할 수 없었거니와 자신이 처음 암흑 날개를 세웠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이젠 어둠의 신 '아스트라이모나드'를 섬길만한 사람들이라면 기껏해야 사회의 최하층 계급들이나 가능할 법하지만 그나마도 이번 사태를 통해 아스트라이모나드 신앙이 얼마나 큰 폐해를 주는지 분명해진 만큼 자신들을 따를 유능한 인재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그런가... 이런 걸 두고, 하늘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것인가."
암흑 날개의 처참한 실패를 곱씹어보던 샤키르는 곰곰이 생각해봐도 결국 자신들이 하늘에게 버림받은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암흑 날개의 크고 작은 실수들과 오판들이 쌓이고 쌓여 암흑 날개의 실패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자신의 별장을 살펴보던 샤키르는 자신의 시야에 잡힌 앨범 한 개를 집어 그 안의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오벨리우스 나셸... 결국 네 승리로군."
SEM 사의 현 CEO 오벨을 찍힌 옛 사진들이 담긴 앨범의 사진들을 보며 샤키르는 씁쓸하게 그의 본명을 읊조리며 먼 과거의 이야기를 잠시나마 떠올리고 있었다. 과정이 중요한가, 결과가 중요한가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 어릴 적의 샤키르 나셸이 겪었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기울어진 가세와 그로 인한 암울한 삶, 그리고 무언가가 자신의 뒤를 언제나 쫓아오는 것 같았던 불안함은 샤키르로 하여금 모든 것은 결국 '결과'뿐이며, 그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악착같이 부활했고, 그에 맞춰 세상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터득해가며 살아남았지만 그 과정에 세상에 대한 그의 시선도 함께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직 어렸음에도 오벨은 그 질문에 대해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이 있어야만 나오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그저 아무 걱정없이 자라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순진한 답변일 뿐이라 일축해버렸지만 세상의 이치가 억지를 부리다시피하며 자신과 암흑 날개, 그 전신인 애프터라이프의 파멸을 기어이 이끌어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맞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저 네 생각이 옳았고, 내 생각이 틀렸을 뿐."
하지만 샤키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중에 후회할 것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샤키르 자신의 지론이었다. 애프터라이프가 보여줬던 압도적인 힘과 모두에게 공평했던, 그 공평의 의미가 '모든 것은 죽는다'는 식의 공평이었을지라도 분명 공평했던 어둠의 신의 담대함에 반했기에 어둠의 신의 완전한 몰락 이후에도 비밀리에 암흑 날개를 창설해 신의 재림을 꾀했던 것이었다. 설령 애프터라이프와의 접촉과 암흑 날개의 창단이 자신의 패착이었다해도 후회는 없었다. 세상의 이치가 기어코 억지를 부려 자신과 암흑 날개, 애프터라이프의 파멸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샤키르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날 잡으러 올 때까지 여기서 생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나."
그리고 이제 샤키르의 날개도 완전히 부러져버린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만약 시큐리티 포스나 오벨이 자신을 사로잡으러 온다고 해도 더 이상 저항할 여력도 없었다. 그렇게 샤키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들 동안 다시는 볼 수 없을 세상 모든 것들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에 새기기 위해 노력했다. 맑은 공기,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를 살며시 스쳐지나가는 소리,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들. 샤키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요."
그리고 별장에서 은거한지 30일째 되던 날, 조용히 물을 들이키며 하루를 시작하던 샤키르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큐리티 포스도 능력 좋구나. 이렇게나 조용히 찾아오고 말이지."
바쁜 와중이었을텐데도 기어코 자신을 직접 찾아온 오벨을 보며 샤키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진실을 감추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니지. 애프터라이프의 힘, 그리고 어둠의 신의 공평함. 너도 알다시피 이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 누구는 온갖 억지에 휘둘려도 기어코 살 길을 찾고, 누구는 온갖 기회를 잡아도 별의 별 억지로 그 기회들을 다 잃어버리지 않더냐."
밖에 시큐리티 포스가 대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샤키르의 마지막 말을 잠자코 듣는 오벨이었다.
"너도, 나도 그렇다. 사업의 실패, 무너진 가세,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신세.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별을 바라보았고, 나는 땅을 내려보았지. 뭐, 결과는 보다시피 이렇지. 네 아버지는 너라는 유산을 남겼지만, 나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 했다.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샤키르는 오벨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아직 어렸을 때, 내가 네게 던진 질문 기억하느냐?"
"과정이 중요한가, 결과가 중요한가. 저는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었습니다."
"그래... 나는 결과만이 모든 것이라 생각했지. 과정은 그저 결과를 포장하기 위한 눈속임이라 생각했고. 헌데, 그렇지도 않더구나."
샤키르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분하더군. 어린 아이의 순진한 말이라 치부했던 네 말이 돌고돌아 옳았음을 증명했으니까. 왠지... 빛의 신이나 어둠의 신보다도 훨씬 위에 있는 무언가가 나와 암흑 날개에게 처음부터 억지를 부려 기어코 박살을 냈다는 생각도 들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게 내게 주어진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다면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습니까?"
"이미 준비되었다."
처량했지만 인과응보였다. 오벨의 신호와 함께 시큐리티 포스 대원들이 진입하고, 저항을 포기한 샤키르를 현장에서 체포해 압송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힘없이 압송되는 샤키르의 모습에 오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홀로 중얼거렸고, 그를 마지막으로 샤키르의 별장에는 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 리스를 포함하는 총 일곱의 장로들과 샤키르 나셸이 피고석에 앉은 채 암흑 날개 수뇌부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워낙 벌여놓은 일들이 크디 컸던 만큼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재판이었지만. 그런 와중에 샤키르의 눈에 금발과 보라색 눈의 미소년이 눈에 띠었고, 그를 알아본 샤키르는 허탈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기가 막히는군... 분명 죽었어야 할 녀석이 기어이 살아남아서 태평하게 우리의 심판을 구경할 줄이야."
자바트 장로의 말이었다. 뉴스의 내용대로라면 체포되어 이례적으로 신속히 사형 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루샬카가 보란 듯이 세 쌍둥이와 함께 자신들의 재판을 구경하고 있었으니 그가 무슨 짓을 했을지는 뻔한 일이었지만 이미 법적으로는 사망한 인물이었고, '루샬카를 닮은 인물'로 간주되므로 무어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형님. 참 기가 막힙니다. 설마 루샬카가 살아서 우리의 재판을 구경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것이냐. 이미 법적으론 죽었다니 뭘 어쩔 수도 없고 말이야."
펠라니스 형제 역시 자신들과 루샬카의 처지를 비교하며 허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무 허탈합니다. 너무 허탈해서 화조차 나질 않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아즈라 여장로와 르보리스 장로 역시 그 허탈함에 화조차 나질 않고 있었다. 그런 장로들의 분위기 속에서 눈치없이 화를 내는 인물이 있었다.
"너, 너 이 자식! 넌 분명 죽었을텐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리스였다. 전용의 구속복 차림으로 옴짝달짝 못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분명 죽였을 루샬카가 멀쩡히 살아서 자신과 다른 장로들의 최후를 구경하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법정에서 소란을 부리려했었고, 그 모습에 바르타 여장로가 그녀에게 박치기를 하며 닥치라는 식으로 응수했다.
"입 다물어! 네년이 벌여놓은 개짓거리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뭐라고?! 나 아니었으면 너희들이 뭘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쓰러진 와중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리스에게 제대로 짜증이 난 펠라니스 형제가 죽을 땐 죽더라도 화풀이는 하고 죽자는 심정으로 그녀를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고, 결국 일련의 소란으로 인해 재판이 일시 중지되기까지 했었다.
"...이상, 피고 샤키르 나셸 외 7명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판사의 최종 판결이 끝나자, 사형 선고라는 말에 눈이 뒤집힌 리스가 마지막까지 고래고래 악을 쓰며 항변을 하고 있었다.
"웃기지 마! 난 그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야! 완전한 존재가 되어 신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알고 싶은 게 뭐가 어때서! 대체 갈망하는 게 뭐가 어때서!"
이미 선고가 내려진 이후였기에 리스의 발악은 무의미할 따름이었지만 그녀는 추하게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옳음을 항변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뭔데? 네까짓 게 대체 뭐라고! 건방지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고!"
이젠 눈에 뵈는 것도 없는 리스의 추태에 보다 못 한 시큐리티 포스 측의 대원들이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린 후 강제로 끌고나가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고, 이후에 장로들이 순차적으로 법정에서 퇴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장로 샤키르 나셸이 세쌍둥이와 함께 있는 루샬카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아버린 그의 눈빛에서 루샬카는 씁쓸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알베르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도 저 자리에 서서 실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므로.
"언니, 괜찮아?"
"언니가 아니라니까."
그런 와중에 리나가 루샬카의 손등을 콕콕 누르며 부르고 있었고, 그걸 본 니엔이 '언니'가 아니라고 정정해주고 있었다. 루샬카 입장에선 이미 여러번 들어온 소리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암흑 날개의 장로로서 벌였던 잘못들에 대한 일종의 속죄로서 암흑 날개의 리스가 뿌린 성유물의 광신도들의 손에 부모를 잃은 리나와 니엔, 그리고 카이의 보육을 책임지게 된 루샬카는 세쌍둥이를 끌어안으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루시도 지켜보고 있었다.
"고생 많으시겠네요, '언니'?"
"하하... 스스로 선택한 고생이야."
아직 루카스는 몰랐지만 알베르의 안배로 루시의 모습으로 위장해 리스의 시선을 돌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루시의 안전을 보장해준 루샬카와 루시는 그것을 계기로 의자매로 보이는 의남매 사이가 되어있었고, 루시의 장난에 루샬카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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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
오벨 대표의 본명이 오벨리우스 나셸이었군요. 하긴 샤키르랑 친척이니 같은 성씨를 쓸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습니다만... 그리고 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도 운 좋게(?) 불량품 패러사이트 퓨저너에 걸려서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군요. 역시 예산이 모자라서 그런지 불량품에 걸린 조직원들이 많았나 보네요. 아무튼 이번 에피소드도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끝물을 향해 달려가는 본편이로군요 조금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요새 번아웃이 온 건지 본편 내용 구상이 잘 안 되고 있네요...ㅠㅠ 그래도 최선을 다 해 본편을 써 보겠습니다!!! 그리고 세 쌍둥이랑 짱친 먹고 루시랑 의남매 맺은 루샬카는 여자 취급이 패시브로 장착된 것 같군요. 루샬카 입장에선 기분이 참 묘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오토코노코, 다른 말로 낭자애니까 (끄덕)
Vanitas vanitatum,
밀과 가라지가 걸러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