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스위스의 어느 마을 부흑 쌩 삐에흐(Bourg Saint Pierre)마을의 이야기.
프랑스의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1984년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마을 촌장이 4만 5천프랑짜리 1800년 5월 징발 영수증을 들고왔음.1800년 당시 7억원정도 되는 어음을 명시해두고 있는 서류였는데 징발영수증이 그러면 뭐냐?
제아무리 미군 같은 먼치킨이라도 보급선이 닿지를 않는다면 현지에서 징발을 했음. 약탈과는 좀 다른데, 보급관이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에게서 물자와 인력을 받고 "나중에 이거 들고 우리 정부한테서 돈 청구받으셈 ㅇㅇ"라고 징발영수증을 작성해줌.
절차가 이래도 사실상 해당 주민들이 안그래도 푼돈으로 후려쳐진 그 재화에 해당하는 대가를 영수받기란 정말 힘들어서 약탈이나 다름없기는 마찬가지였음. 그걸 들고가서 달라고 해도 나중에 부역행위로 본국에서 처벌받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
근데 그래도 계약은 계약. 나폴레옹의 군대가 1800년에 해당 마을에서 발행한 징발 영수증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의 적통임을 자처한 현 프랑스 공화국에도 유효한 것이었고 이 마을은 184년동안 그 서류를 보관하고 있었음.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징발서류의명시된 조항과 프랑스정부의 부채대응 전례에 있었음:
"프랑스의 제1통령(나폴레옹)의 군대는 해당 지역에서 징발을 했음을 지휘관령에 따라 인정한다. 해당 부채의 취급은 보통의 금융부채와 상동케 처리하며 어음에 대한 환수는 즉각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것은:
1.프랑스 공화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승계했기에 지불 의무가 있으며
2.금융부채와 상동하다=적정 금리상에서의 이자를 징수할 수 있다.
3.어음에 대한 환수는 즉각적=채무자(부흐 쌩 삐에흐 마을)이 언제건 돈을 요구할 수 있음
1984년 미테랑 대통령이 왔을 때 저 두번째부분이 발목을 잡았음. 1800년 당시 7억원 상당의 영수증은 이자가 184년동안 차곡차곡 붙어서 당시 가치로 3000억원으로 불어나버렸음. 주긴 줘야하는데 너무 큰 돈이 되어버린거임.
그래서 어쨌냐? 프랑스가 지불하기는 했는데 거의 200년을 묵어버린 그 오랜 빚을 그냥 원금인 7억원만 주고 땡쳤음.
스위스한테도 이렇게 굴었는데 프랑스가 식민지 국가들에게 사과를 한번이라도 한적이 있었는가? 그건 의문.
관련기사: http://www.upi.com/Archives/1983/04/11/Swiss-village-still-billing-Napoleon/3458208410081/
관련자료: www.billhung.net/ba103/hw01/UGBA_103_hw_2.doc
졸렬한새끼들
국가란 결국 커다란 깡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별명이 유럽짱■잖어
3천억이면 엄청나게 큰돈이라 바로 갚아주진 못할수 있지만 184년 무이자 상환은 너무하네
저건 어음을 준거잖아, 영수증까지 가지고 있단건 징발 보단 구입의 의미가 큼, 근데 저걸 어느정도 절충해서 줘야지 원금만 주는건 좀,,
국가란 결국 커다란 깡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나플리옹을 키작은 난쟁이똥자루로 보는 사람들의 이유...
아예 안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건 졸렬한게 아니라 대단한거.
대부분은 현지 징발해도 보상 한 푼 못 받음.
테크토닉스
저건 어음을 준거잖아, 영수증까지 가지고 있단건 징발 보단 구입의 의미가 큼, 근데 저걸 어느정도 절충해서 줘야지 원금만 주는건 좀,,
3천억이면 엄청나게 큰돈이라 바로 갚아주진 못할수 있지만 184년 무이자 상환은 너무하네
별명이 유럽짱■잖어
19세기 세라 바트먼이 살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대부분이 죽었다. 그러나 세라 바트먼은 살아 남아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세라 바트먼의 큰 엉덩이와 가슴 등의 특이한 외형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된 영국인 윌리엄 던롭(William Dunlop)은 이를 돈벌이에 이용 할 목적으로 세라 바트먼을 '구입'한다. 그 이후 세라 바트먼은 유럽을 다니며 인간 전시물이 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며 윌리암은 큰 돈을 벌게 된다. 세라 바트먼은 광장, 대학, 서커스 등에서 나체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알콜중독에 빠지고 매춘부가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사망 이후에도 그의 유해는 정상적으로 반환되지 않고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며,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인종차별적 주장도 여전했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바트만의 유해는 뼈와 성기, 뇌 등의 내장이 들어내져 연구 대상이 되거나, 박제로 만들어져 1974년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후에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유해 반환 시위가 일어났으나 프랑스는 세라 바트먼의 박제에 대해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는 관련 법규를 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의 반환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다른 법 규정을 들어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였다. 결국 2002년 5월 프랑스는 악화되는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세라 바트먼의 유해를 200년 만에 본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케이프 주에 되돌려 주게 되었다. ========================================= 자유,평등,박애의 나라....쑻
소송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