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 시대의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
1979년 발견 당시 중원군에 있었기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로 불리기도 함.
장수왕 때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상징하는 유물이자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꿨다는 것을 실증하는 유물로유명하며,
올해로 발견 40주년을 맞음.
이 비석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그동안 알 수 없었음.
'모년 모월 모일에 누구가 무엇을'으로 시작하는 것이
통상적인 비문의 시작인데,
충주 고구려비는
'5월에 고려 태왕이...(五月中高麗太王...)'로 시작해
연도가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
다만 새겨진 내용 중에
'12월 23일 갑인(十二月廿三日甲寅)'이 있어서
역사책의 내용 등을 감안해
5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첨단 기술을 동원해
비석 전체를 정밀 촬영해 분석한 결과,
비석의정면 상단 부분에서
'영락 7년 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를 확인함.
영락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사용한 연호로,
영락 7년은 서기 397년에 해당함.
이렇게 되면 연도 표기 없이
'5월에 고려 태왕이...'로 시작하는 비석 정면의 비문도
새로 확인된 글자를 합쳐서
'영락 7년인 정유년 5월에 고려 태왕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짐.
또한 '12월 23일 갑인(十二月廿三日甲寅)'도 다시분석해서
'12월 27일 경인(十二月廿七日庚寅)'으로 해독되었다고주장하며
서기 397년 음력 12월 27일이 경인일이라고 덧붙임.
이번 연구 결과가 정설로 받아들여질 경우,
광개토대왕은 북방을공략하고
장수왕은 남방을 공략했다는 기존의 학설과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게
장수왕 때라는 내용까지 포함해서
역사책을다시 써야 함.
근데. 곧 누가 와서 지적할거 같지만. 저 중원 고구려비가 광개토대왕때 나왔다고 해도. 장수왕이 개로왕 모가지 잘라간건 엄연한 사실이라. 장수왕이 남방진출을 시도했다는 학설이 부정될일은 없음.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북방만 공략한것도 아니고 사방팔방 다 공략해왔던게 이미 기존 학설이고.
사학과 학생들 ㅈ됬네.
삼국시대 기록물이 줫나게 없어서 일어나는 문제
저거 주제로 논문 작성하던 대학원생: ㅅㅂ
자꾸 이 글 보이는데, 과장된 측면이 있고, 아직 문제가 있습니다. (1)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정밀 촬영한 것은 맞습니다. (2) '永樂七年歲在丁酉'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나 학계의 일치된 견해가 아닙니다. (3) '年, 歲' 등 글자가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나, 제일 중요한 '永樂'의 해독은 재단 내 개인 연구자 1인의 견해입니다. (4) '永樂' 부분은 훼손이 너무 심해 정밀 촬영한 사진을 갖다놓아도 판독이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회의적입니다. (5) 재단의 정밀 촬영으로 새로운 글자들을 알아낸 것은 큰 성과입니다. (6) 하지만 사실 학계의 전반적인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렇게 개인 연구자의 독단적인 판독('永樂')이 언론을 타고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신입 대학원생: 캬 논문주제 생김! 개꿀!
기존 학설의 가장 웃긴점 학계 거물의 주장이라는 이유로 꿈결에 자기가 봤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통용되었음ㅋㅋㅋ https://news.v.daum.net/v/20191120113749005 경향신문 1979년 6월9일 7시간에 걸친 고구려비 학술대회에서는 두계 이병도(1896~1989)가 “밤늦도록 고구려비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비문 전면에 ‘건흥(建興)’과 ‘4년’ 글자가 보였다”고 주장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수험생들이야 몇년 뒤에나 적용되겠지 바로 당장엔 적용받기 힘듦.
중원고구려비의 설립 시기랑. 장수왕의 백제공격이 어느 시기부터 시작됬나만 좀 수정이 들어가지 그거 말고는 크게 변할거 없을거 같구만.
비석에 쓰인돌을 저때 제작한게 아니니 의미 없지 않냐
사학과 학생들 ㅈ됬네.
ㄴㄴ 사학과 학생은 ㅈ안됌. 대학원생이 ㅈ됌
논문 새로 쓸 생각에 행복하겠지?
삼국시대 기록물이 줫나게 없어서 일어나는 문제
신라 향가 + 고구려비 2중 발견
저거 주제로 논문 작성하던 대학원생: ㅅㅂ
태왕사신기짤
저게 제2의 태왕비였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라서 학계 난리났대잖아
지금 현재 가장 졋된건 저 관련 논물을 쓰던 사학과 대학원생................ 논문 다 날아가게 생김...
[삭제된 댓글의 댓글입니다.]
이난쟁
신입 대학원생: 캬 논문주제 생김! 개꿀!
젤 ㅈ된건 수험생아니냐 저아재들은 연구거리 늘면 좋아하더라
아젤키버:
수험생들이야 몇년 뒤에나 적용되겠지 바로 당장엔 적용받기 힘듦.
사학과였는데, 등골이 서늘해지네.
근데. 곧 누가 와서 지적할거 같지만. 저 중원 고구려비가 광개토대왕때 나왔다고 해도. 장수왕이 개로왕 모가지 잘라간건 엄연한 사실이라. 장수왕이 남방진출을 시도했다는 학설이 부정될일은 없음.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북방만 공략한것도 아니고 사방팔방 다 공략해왔던게 이미 기존 학설이고.
봉완미
중원고구려비의 설립 시기랑. 장수왕의 백제공격이 어느 시기부터 시작됬나만 좀 수정이 들어가지 그거 말고는 크게 변할거 없을거 같구만.
하여튼 대학원생은 ㅈ된거맞지? 그럼 뭐 상관없음
뭐 중원고구려비로 본~~어쩌구 하는 주제라면 다시써야겠지.
진짜 광개토 닉값 제대로였네
광개토대왕이 남하까지 했다고? 무슨 철인이냐 ㄷㄷ
밑둥 부러질거같아서 불안
기존 학설의 가장 웃긴점 학계 거물의 주장이라는 이유로 꿈결에 자기가 봤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통용되었음ㅋㅋㅋ https://news.v.daum.net/v/20191120113749005 경향신문 1979년 6월9일 7시간에 걸친 고구려비 학술대회에서는 두계 이병도(1896~1989)가 “밤늦도록 고구려비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비문 전면에 ‘건흥(建興)’과 ‘4년’ 글자가 보였다”고 주장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 ㄹㅇ??? 진짜??? 혼또니??? 이게 공식이었다고???? 뭐하는 짓거리지.........
요건 촌극이라니까 걍 에피소드 아냐?
아냐 저 기사 전문 보면 저게 그래도 정식 학설로 받아들여져서 국내 두 학설 중에 우세 학설로 받아들여졌대....시벌ㅋㅋㅋㅋㅋ
... 일본 비웃을일이 아니였구나...
호우명 그릇에 남방정리한거 이미 나오는데
그 무적의 탄소연대측정법을 저 비석에는 안 썼던거임?
루리웹-8569269809
비석에 쓰인돌을 저때 제작한게 아니니 의미 없지 않냐
안료라도 있었으면 되는데 음각으로 파낸거라
돌을 만들어서 비석 새운게 아니라 판거라 못쓰지
자꾸 이 글 보이는데, 과장된 측면이 있고, 아직 문제가 있습니다. (1)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정밀 촬영한 것은 맞습니다. (2) '永樂七年歲在丁酉'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나 학계의 일치된 견해가 아닙니다. (3) '年, 歲' 등 글자가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나, 제일 중요한 '永樂'의 해독은 재단 내 개인 연구자 1인의 견해입니다. (4) '永樂' 부분은 훼손이 너무 심해 정밀 촬영한 사진을 갖다놓아도 판독이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회의적입니다. (5) 재단의 정밀 촬영으로 새로운 글자들을 알아낸 것은 큰 성과입니다. (6) 하지만 사실 학계의 전반적인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렇게 개인 연구자의 독단적인 판독('永樂')이 언론을 타고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기존학설이 꿈에서 비롯된거라 꿈이 맞을지 이게 맞을지 그것도 흥미진진.
영양왕때 작성했다는 신집이 지금이라도 발견이 되었으면.....
바꿔야할 역사가 한두가지가 아닐걸? 일단 삼국시대라는 말부터가 오류니까.
광개토대왕이 남쪽 특히 백제 털어버렸다는건 책으로 보긴 했는데 특히 요새 관미성 함락시킨거. 근데 관미성이 지금 어디쯤이지?
인천이라는 학설이 가장 주류였고 아산일수도 있다는 학설이 있기도 했는데 저 글이 사실이면 주류가 바뀔수도 있어요.
찾아보니까 강화도 부근이란 말도 있네요.
강화도도 인천으로 들어가지 않나요...?
애초에 광개토대왕때 신라땅까지 가서백제가야왜 삼국연합군을 털고 백제성 56개 털어버렸는데 뭔 광개토왕 북방 장수왕 남방 어쩌고야. 또 오버하네
기존에는 광개토대왕이 한강 이북까지 털고 신라와 백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가 정설인데 저게 만약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념하는 거면 광개토대왕때 이미 한강 이남까지 싹다 털었다는 말이 되서 고쳐야 할 부분 생기는 거군요
중원비가 광개토대왕 시기면 털고 돌아간데 아니라 아예 털고 영토로 삼았다는 이야기니까요. 심지어 397년이면 신라가 백제-왜 때문에 고구려랑 손잡기도 전의 일이기도 하고
개시발.. 지금 한국사 검증 시험 준비중인데...
걱정마 일단 저런 논란이 있으면 시험에 안나오고 시험에 나오더라도 기존 학설이 완전히 깨진게 아니라 오답 처리 될 일은 없음
아, 진짜? 그건 다행이네.
광개토대왕님. 왜 백제 신라를 중간까지만 정복하셨나요. 기왕 하는거면 완전히 정복하고 통일을 하시지..
은평뉴타운
광개토 대왕때 남쪽 방향은 신라를 도와 왜구 쳐부수는거임. 하는김에 금관가야도.. 남쪽으로 영토를 늘리는게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