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 초,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는 여허, 코르친 세력과 정략혼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건주에 대한 저항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잔타이의 의도는 여허와 코르친측이 부잔타이가 보낸 폐백만을 받고 약정된 혼례 대상을 보내지 않음으로서 무산되었다. 부잔타이는 큰 모욕을 얻는 동시에 당장 외교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측에 사실을 실토하고 대신 누르하치에게 또 다른 여식을 내어주어 본인에게 보내준다면 앞으로 건주에 계속해서 협조할 것을 다짐했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외교적 행보가 건주에 들통나 공격당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누르하치 역시 부잔타이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부잔타이에게 자신의 조카딸이자 본인의 동생인 슈르가치의 딸인 온저를 추가로 시집보내어 정략혼 관계를 강화했다.
부잔타이가 1603년까지 지속적으로 친건주, 반건주 행보를 반복해서 번갈아가며 보임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가 부잔타이를 응징치 않고 계속해서 용서하며 그를 자신의 편으로 붙잡아 두려 한 것은 당시 누르하치가 이중전선 그 이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유추된다.
누르하치는 당시 주요 경쟁 상대로 여허를 두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울라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응징하겠다고 하다간 여허가 해당 문제에 대해 행동에 나서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비록 1593년 구국지전에서 여허와 울라를 위시로 한 9개 부족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전적이 있던 누르하치였으나 그는 왠만해서는 그런 위험부담을 다시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로부터 한 번에 하나의 적만을 상대하면서 위험부담을 최소화 하려 했다. 부잔타이가 건주에 붙었다가 여허에 동맹을 제의했다 하는 행동을 함에도 최대한 그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또 다시 조카딸을 시집 보낸 것 역시도 이러한 위험부담 최소화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누르하치는 1603년 울라와 재차 정략혼 관계를 체결한 이후에 대(對)울라외정이 안정화 상태에 들어가자 당분간 여허와의 싸움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건대 누르하치는 확실히 한 번에 하나의 상대만을 상대하려 했고, 그 때문에 울라에 비해서 자신의 세력이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부잔타이의 요청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보를 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잔타이에게 온저를 시집보낸 이후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누르하치는 거점을 1588년부터 본인이 거점으로 삼아왔던 퍼 알라에서 기존의 거점 인근으로 옮기려 했다. 그것은 누르하치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인민의 수가 상당히 늘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협소한 퍼 알라를 중심으로 한 통치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숙수후와 기야하 강 사이, 즉슨 1588년에 본인이 퍼 알라를 건설하기 이전에 세거했던 지역과 거의 비슷한 위치의 지역으로 세력의 거점을 옮겼다. 이 신거점은 '허투 알라'로 칭해지며, '옆으로 펼쳐진 언덕'1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때 건설된 허투 알라는 후금이 건국된 이후 1619년까지 초기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허투 알라는 구조적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 자체의 크기만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이민환이 평하길 약 3만여명의 사람이 세거할 만한 크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내성을 둘러쌓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던 외성의 경우 그 크기가 내성보다 더 거대하여 관리가 힘들었기에 허투 알라 완성 이후 15년여가 지난 뒤에는 사실상 방기되었다.2
허투 알라는 기본적으로 퍼 알라와 비슷한 구조였다. 누르하치와 어린 아들을 포함한 직계 가족들이 내성의 가장 안쪽에 세거했다. 누르하치의 저택에는 외부의 사신들을 맞이하는 접견 장소와 큼지막한 거실을 갖춘 저택이 존재했는데 이것이 사실상 이 시기의 누르하치 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일반 부민들의 경우 외성의 가장 바깥 쪽에 세거했다.3
허투 알라가 퍼 알라와 비슷한 구조였다고는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허투 알라는 퍼 알라보다도 훨씬 거대한 규모였다. 건설 기간도 그에 비례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 소요되었다. 당장 천도 자체는 1603년에 이루어 졌으나 실질적인 수도로서의 완성은 1605년쯤에야 이루어졌다. 즉 누르하치가 이주를 택한 시점에도 성벽등의 방어체계는 구축되지 않았으며, 누르하치가 이주한 이후 추가 공사를 통하여 내성벽과 외성벽을 확보했다. 조선측과 후금측의 기록을 모두 살펴보면 내성벽은 1604년에, 외성벽은 1605년에 건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4
누르하치가 허투 알라로 언제 천도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부인인 몽고저저가 죽은 시기인 1603년 음력 9월 이전에 천도 기사가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보건대 확실히 음력 9월 이전에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누르하치가 허투 알라로 이주했다는 소식이 1603년 음력 8월 초에 평안감사 허욱에게 들어온 것을 보건대 음력 7월쯤에는 이주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의 허투 알라의 방어력은 성벽의 미완성으로 인해 상당히 약했고 그것은 1604년까지 누르하치 세력의 주요한 약점으로 자리잡았다.
허투 알라의 건설은 누르하치의 나라가 한 단계 더 진보하여 '후금'에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허투 알라의 건설로 인해 누르하치 세력의 행정통치기능은 보다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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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허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평평한, 넓은 등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이훈·김선민 역, 푸른역사, 2009, p.104. / 패멀라 K.크로슬리, 만주족의 역사, 2013, 양휘웅 역, 돌베개, p.127
2.이민환, 건주문견록, 內城則以木石雜築。高可數丈。闊可容數三萬衆。有七門。外城。頹圮幾盡.
3.패멀라 k.크로슬리, 앞의 책, p.129
4.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8월 8일, 만주실록 을사(1605년) 음력 3월, 등록류초 14책 갑진력 음력 7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