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는 1599년 초부터 동해 여진 세력들과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자신의 휘하 대신들에게 만주문자의 창제를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금은의 채광과 철의 고급 제련을 시작하며 국가의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하는 등 내외적으로 열정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그렇게 치국에 힘을 쏟던 동안, 같은 해서 여진계 세력이자 서로간 동맹관계를 구축했었던 여허와 하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허의 나림불루는 1593년 구러산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패배한 이후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는데 그 과정에서 본인들의 동맹이던 하다도 압박하게 되었다. 한편 하다의 버일러였던 멍거불루는 비록 여허의 도움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이자 조카였던 다이샨을 제거하고 하다의 지도자가 되었고, 덕택에 여허를 줄곧 충실히 도왔으나 구국지전의 패전 이후로 이어진 여허의 불안한 행보를 경계하게 되던 참이었다.
불안한 관계가 지속되던 와중에 멍거불루는 여허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종실의 딸1을 처로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나림불루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멍거불루는 이 때문에 여허로부터 팽을 당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한 듯 하다.
한 때는 가장 강력했던 세력이었으나 지금은 몰락하여 해서 여진계 세력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하다의 군주로서, 멍거불루가 여허 세력과 맞붙어 1 대 1로 승리할 수 있을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존재치 않았다. 결국 멍거불루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세력인 여허의 영향력과 압박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세력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아들 세 명을 인질로 보내고, 그 대신 누르하치와 동맹을 맺은 뒤 그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
누르하치는 멍거불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여허와 하다간의 관계가 분열되는 틈에 하다를 지원하고 그들을 친건주 성향의 세력으로 바꿔 놓으면 숙적인 여허를 상대로 한 외교구도에서 우위를 점유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피옹돈과 가가이, 자신이 신뢰하는 두 명의 자르구치에게 2천의 군대를 맡겨 하다에 파견했다. 그 군대는 하다에 주둔하면서 혹시라도 여허가 하다에 대해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면 즉시 하다를 지원할 병력이었다. 요컨대 주(駐)하다 건주군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군대였다. (1599년 음력 3월)2
여허측의 나림불루가 하다와 건주의 연대에 관한 소식을 듣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림불루는 여허의 영향권 아래에 위치했던 하다가 건주에 도움을 요청하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건주가 여허-하다간 관계에 개입한다면 하다에 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나림불루는 명나라 개원의 통사에 중재를 요청, 하다에 '건주에 인질로 보낸 세 명의 아들을 돌려받은 뒤 하다에 주둔한 건주군과 그 지휘관들을 제거한다면 이전에 요구했던 여허 종실의 딸을 처로 주고 동맹관계를 재정립하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보냈다. 이 때 나림불루가 직접적으로 사신을 파견치 않고 명나라 통사에게 대신 임무를 맡긴 것은 하다에 건주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유추된다. 나림불루가 직접적으로 여허의 사신을 보낸다면 건주측에 본인의 제안이 파악될 수 밖에 없었기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멍거불루는 피옹돈과 가가이의 군대가 하다에 주둔한 와중에 여허측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허와의 비밀 논의에 들어갔다.
멍거불루가 이미 건주에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여허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멍거불루가 외교적으로 무능했기 때문으로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멍거불루로서는 자신의 요청을 받은 누르하치가 건주의 군대를 하다에 주둔시킨 것에 두려움을 품었던 것 같다.
본인이 군대를 요청하긴 했으나, 누르하치 역시 하다로서는 믿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건주군이 유사시 자신을 제거하고 하다를 점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던 차에 여허로부터 이런 제안이 들어오자 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를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멍거불루의 실수였다. 이러한 정보는 누르하치에게 새어나갔고, 누르하치는 이에 진노하여 하다에 대한 대규모 공격전을 준비했다. 그는 명분을 잡은 김에 아예 약화될대로 약화된 하다 세력을 한 차례 공격으로 완전히 복속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1599년 음력 9월의 일이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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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이전에는 당시 동여허의 버일러였던 나림불루의 딸로 서술했다. 이는 실록상에서 나림불루가 친건주성향이 강해진 멍거불루를 회유하면서 '딸을 주겠다'고 한 것에 기반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이는 재고되어야 할 듯 하여 단순히 '종실의 딸'로 수정한다.
2.만주실록 기해년(1599) 음력 3월. 가가이는 어르더니와 함께 만주문자 창제에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만주문자 창제에 관한 명령을 받은 지 1달여만에 군사임무에 종군하게 된 것을 보아 이 이후부터는 어르더니가 사실상 만주문자 창제의 단독 책임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3.이상 청태조무황제실록, 만주실록 기해년(1599)음력 9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