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차까지 스토리를 다 보고 난 뒤에 이를 나름 정리해보고 나니, 문득 전작인 엘든 링의 구도나 요소와 흡사하면서도 이를 비틀어낸 부분들이 보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즉, 제가 지금부터 쓰는 글은 엘든 링을 안 해보신 분들이면 '뭔 개소리야;;' 하실 수 있습니다.)
1. 핸들러 월터와 여왕 마리카
월터는 여러모로 엘든 링의 여왕 마리카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이 둘은 엄연히 '착취하고 억압하는 쪽'의 사람에 속합니다.
월터가 속한 오버시어, 그 전신인 기술조사연구소, 그리고 더 넓게보면 월터가 동업하는 기업은 루비코니언을 착취하는 측에 해당합니다.
마리카 역시 황금률 세력의 수장으로써, 틈새의 땅에서 황금률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억압하고 토벌했습니다.
둘은 분명 사회 구조 상으로 기득권 지배층의 핵심 중추에 속하는 인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터와 마리카는 일차원적인 억압자, 빌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이는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대의를 가지고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월터의 대의는 위험한 코랄을 전부 불태워, 인류를 지키는 것이고
(그 코랄이 하나의 생명이라는 게 문제지만, 월터는 그 사실을 몰랐으니)
마리카의 대의는 틈새의 땅을 간섭해오는 우주적 존재로부터 틈새의 땅 토착민들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단순한 억압자, 착취자에 머무르지 않고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상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월터는 코랄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행성에 있는 이주민들이 몰살당하고 성계 단위의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불사합니다.
마리카는 엘든 링을 파괴하여 틈새의 땅에 혼돈을 불러온 뒤 파쇄전쟁이라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자신의 사명을 스스로 완성하지 못하고 플레이어에게 사명의 유지를 남깁니다.
프롬의 전통답게 그 사명은 꽤 무겁게 주인공을 억누르는 저주 같은 것이죠.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이 둘은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마리카의 대의는 가장 높은 곳으로 창끝이 향했습니다.
틈새의 땅 내부의 세력들끼리 착취하고 억압하는 구도에서 벗어나, 틈새의 땅 외부에서 보다 더 근원적으로 이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우주적 존재를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리카에 의해 억압받던 세력들까지 기존의 황급률 세력과 똑같은, 다음 시대의 주역이 될 기회를 부여받게 됩니다.
엘든 링 수복이라는 사명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사명에 불과하며, 진짜 진의는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답'을 찾아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플레이어가 표먼적인 대의만을 맹목적으로 따라가 다시 황금률의 시대를 수복하면, 무너져가는 시대를 해결하지 못하고 근원적인 통제자들을 몰아내지도 못한 채 쇠퇴의 길을 걷는 미봉책 엔딩이 나게 됩니다.
반면, 월터의 대의는 가장 낮은 곳으로 총구를 겨눕니다.(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루비콘 내부의 통제와 억압 구도에서 보다 더 근원적인 통제와 억압 구도는 '인간에 의한 코랄의 억압'입니다.
엘든 링에 등장하는 우주적 존재들이 가장 근원적인 '착취자'라면, 아머드코어의 코랄은 가장 근원적인 '착취 당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월터의 대의가 진행되는 동안 인간들과 동등한 기회를 획득하기는 커녕, 그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머드 코어에서 월터의 대의를 따르게 되면, 착취 당하는 자(루비코니언과 코랄)이 절멸하고 착취자(기업)들 역시 파멸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이로 인해 작품의 최대 흑막의 계획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플레이어가 '억압하는 쪽에 있었으나 대의와 신념을 가진 선대'의 지시를 따르는 전개임에도 결말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2. 루비콘 해방전선과 미친 불
이와 달리, 주인공이 선대의 의지를 저버리고 착취 당하는 측에 서는 엔딩도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루비콘의 해방자와 미친 불의 왕 엔딩이 각각 그것에 해당하죠.
월터와 마리카가 억압하는 측의 세력이었다면, 루비콘 해방전선과 미친 불 세력은 억압 당하는 측의 세력이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억압자에 의해 고통받고, 그에 따라 억압자를 타도하려하는 이들입니다.
엘든 링과 아머드 코어 모두 이러한 세력들과 접촉하고 이들에 동조할 수 있지만, 이번에도 그 결과는 정 반대의 구도가 됩니다.
아머드 코어의 해방자 엔딩은, 착취 당하는 측에 서서 착취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하는 결말입니다.
하지만 '코랄과 인간'의 착취 구도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고, 최대 흑막의 계획이 아직 건재하다는 점에서 미봉책 엔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대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었을 때 미봉책 엔딩을 보던 엘든 링과 반대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죠.
다만 그럼에도 쇠퇴가 확정적인 엘든 링의 미봉책 엔딩과 달리 이 쪽은 향후 희망적인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점은 분명 다릅니다.
반면 엘든 링의 미친 불의 왕 엔딩은, 착취 당하는 측에 서서 세계를 멸망시키는 결말입니다.
착취당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고통을 계속 키워왔고, 주인공이 이에 동조해버리고 말죠.
그 결과 틈새의 땅이 모조리 불타버려 신화적인 종말과 원점회귀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히려 착취자를 타도하고자 하는 행동이 세계의 멸망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아머드 코어와 정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엔딩에 세계의 종말을 그린 프롬의 전작들은 다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큐에 다같이 죽여버리는 극단적인 결말은 유일무이한 수준이죠.
그렇기에 레이븐의 화염 엔딩처럼 이 결말은 공교롭게도 흑막들에게 빅엿을 먹여버린 셈도 됩니다.
3. 라니와 에어, 차가운 밤의 규율과 코랄 릴리즈
마지막으로 두 게임에서 일반적으로 '진엔딩'으로 취급받는 엔딩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마녀 라니의 목적은 황금률의 시대를 끝내고 별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우주적 존재마저 몰아내고, 틈새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엔딩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완전한 해피엔딩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오랜 전쟁과 쇠퇴를 거듭한 틈새의 땅에 자유가 주어진다고 곧바로 평화와 번영이 찾아올 거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죽음이 존재하지 않던 불로불사의 땅에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인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향후 틈새의 땅을 살아가는 이들은 자유의 이름아래 펼처질 혼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어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코랄 릴리즈의 목적은, 억압당하던 코랄의 해방과 이를 통한 인간과 코랄의 가능성을 찾는 것입니다.
코랄에 대한 근원적인 억압을 몰아내었고, 비로소 코랄과 인간은 생명 대 생명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둘이 대등하게 서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매끄럽게 평화와 공존이 찾아올 것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에어 역시 인간의 투쟁과 발전을 깨달았음을 고려하면, 새 시대는 코랄과 인간의 공존을 이루기 위한 기나긴 투쟁의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방된 코랄이 인간을 공격할 가능성, 인간이 코랄을 부정할 가능성, 아이비스의 불과 같은 대재앙이 또 일어날 가능성, 그 모든 위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엔딩 모두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자유를 쥐어준 채 모든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깔아둔 열린 결말의 형태입니다.
자유의지라는 측면에서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공유하며, 그 과정에서 감당해야 할 고난과 좌절을 부정하지 않는 니체 철학적인 면모가 두드러집니다.
삶이라는 건 원래 그런 셈이죠.
다만 두 엔딩 역시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라니의 별의 시대는, 신이 된 라니와 왕이 된 플레이어가 틈새의 땅을 떠나면서 성립하게 됩니다.
틈새의 땅의 주민들에게 자유를 쥐어준 뒤, 지배자인 자신들이 시대의 주역에서 물러서게 되는 흐름이죠.
새 시대를 연 시점에서 목적을 달성한 것이며, 신의 입장이 된 자신들은 '신은 죽었다'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코랄 릴리즈 이후 레이븐과 에어는 그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새 시대의 주역에 서게 될 겁니다.
코랄 릴리즈를 통해 드디어 코랄이 자유를 얻었으나, 이들은 이제서야 시작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공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다운 투쟁과 삶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4. 결론
쓰다보니 상당히 글이 길어졌는데,
정리하자면 아머드 코어의 스토리에는 게임사의 전작인 엘든 링에서도 활용해온 요소와 구도들이 상당수 보입니다.
통제와 자유의지,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구도라는 측면에서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한 군데 씩 비틀어보이며 엘든 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이야기를 펼처나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레이븐과 에어는 시작점에 서게 되었다" 게시글에서 이 부분이 DLC나 차기작의 암시를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믿고 싶습니다.ㅎㅎ 제발 DLC가 나와줬으면 하는데, 이번에는 코옵 요소가 포함이 되면, 좋겠어요.ㅠㅠ
아머드코어 구작 시리즈 오마주로 가득찬 스토리인데 소울시리즈로 입문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대개 소울시리즈+엘든링이랑 엮어서 많이 고찰하시더라구요
<프롬뇌>이잖슴까 ㅎㅎㅎㅎㅎ
개인적으로 루비콘의 해방자는 흑막의 존재를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냈으면 합니다. 특히 위성포와 에어 기체는 정황상 오버마인드가 개입한거 같은데 복선 없이 그냥 에어가 짱짱 유능해서 해킹도하고 AC도 훔쳐온 것처럼 그려져서 그게 좀 아쉬웠어요.
사실 3회차 루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루트에서 흑막은 되게 잘 숨어있지요, 그나마 중간에 나오는 고스트(은신기체)들이라던가 이런게 없는건 아닌데 로그를 읽어봐도 아리송한게 얘네가 봉쇄기구 블랙옵스인지 흑막의 따까리인지 추측할 건덕지가 없으니 말이지요 술라도 보면 2회차까지는 당연히 기업이나 봉쇄기구에서 고용한줄 알았는데 3회차부터 고스트랑 같이 나오는거 보면 실제로는 흑막의 도구였구요 고의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숨기고 있었던 정보들이라 같아서 3회차때 그 반전이 식상하면서도 신선했던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