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 간 시인의 영혼
―독자와의 만남ㆍ1
*
미래의 어느 시점에 매우 드물게 당신은 한 시인과 이
런 대화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네, 그렇지만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내가 온 과거
에서는 당신들이 죽은 상태에 더 가깝지만, 차마 당신들
이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차라리 내가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설마 내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네, 그렇지만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태어나기 이전
이라면 죽은 상태에 더 가까운 게 사실이지만, 차마 나도
이 미래에 내 자신이 죽었다고 확언하기가 조금 자신 없
기도 하고요. 뭐랄까 아쉽기도 하고……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지금,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독자들의 시점에서는
먼 미래에, 혼자 있는 당신과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보통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당신과 나중에 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갈
팡질팡 횡설수설할 사람입니다. 내가 온 시간으로 돌아
가면 한밤처럼 까만 글자로 미래의 당신에게 전하는 시
를 쓸 생각입니다.
시는 별로 관심 없지만, 당신의 키는 아주 크군요.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그렇다면 당신과 대화하는 이 순간만은 내가 죽은 이
가 맞습니다. 이 모습은 내 영혼입니다. 설명이 좀 길어
질 것 같네요.
과학적으로 영혼은 육체보다 부피가 대략 1.5배 더 큽
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 일생 육체에 갇혀 있던 텐션으
로 스프링 인형처럼 영혼이 순식간에 튀어나옵니다. 그
때는 누구나 깜짝 놀라기 마련이죠. 가령 시한부라 죽을
줄 이미 알았더라도 곁의 사람들은 새삼 깜짝 놀라며 눈
물을 줄줄 흘립니다.
한밤에 베갯잇 같은 살가죽 속에서, 잠결처럼 미래로
튀어나온 흰 솜 같은 나의 영혼과 당신은 지금 이야기하
고 있습니다. 밤이 가기 전에 악수나 하실까요? 이것도
‘인연’인데…… 내게 당신은 먼 미래에 속해 있습니다.
먼 미래는 한 단어로 ‘자연’입니다.
**
그의 영혼은 밤마다 미래로 튀어나온다.
영혼인 그가 무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 있을 때
는 잘 모르지만
영혼인 그는 2미터가 넘는 농구선수 A보다 1.5배가 크다.
어떤 날은 A의 아내인 1.6미터의 B보다 1.5배가 크다.
사실이라서 놀랍고, 때때로 그림자처럼 변하는 키가
이상하지만, 육체가 아닌 영혼의 문제라는 점에서 사실
이고 그다지 놀랍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의 영혼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 먼 과거에서부터, 타
임머신 같은 A와 B의 몸속에 탑승해 있다가 미래로 막
튀어나온 것이다.
요컨대 시인인 그의 영혼은 먼 미래의 A와 B의 영혼이다.
그러고 보니 그를 포함해 셋 이상이 함께 있는 장면을,
그의 시집을 읽는 내내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람마다 그에 대한 목격담이 다르다.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그의 키처럼.
셋 이상의 사람이 모인 곳에서 가끔 그의 시에 대한 이
야기가 나오지만, 영혼 없는 이야기는 겉돌고, 영혼인 그
는 늘 외톨이처럼 떠돌고
떠도는 그를
그의 시집은 읽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나’같은 외톨
이 독자와 시에 한결같이 무심한 어떤 무리의 중간쯤에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
내가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자신의 시집 속으로 부끄
러워 들어오지도 못하고
집 나간 아이의 눈으로 멀찌감치 ‘나’를 보며 서 있다.
그럼에도 시집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아무래도 좀더 가까이 서 있는 그는, 멀리 있는 무리보
다 당연히 1.5배쯤 크게 보인다.
‘원근감’,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은 그저 원근감
이 아닐까.
이제 그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
그렇다.
그는 독자인 당신의 짐작처럼 주로 밤에 목격된다.
그는 깎아놓은 사과처럼, 시큼한 얼굴에 몸에는 검은
멍이 가실 날이 없다.
그는 잘 넘어진다.
우습게도 그래서 우리는 그를 잘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가 우연히라도 길에서 그를 마주치고, “저기 혹시
유령시인 아니신가요?” 돌아볼 기회가 와도, 그는 그 순
간 만화처럼 꽈당 넘어지며 우리의 시야 밖으로 절묘하
게 벗어난다.
매 순간
넘어진 그의 팔꿈치와 무릎 등은 이미 새까맣다.
밤이라는 까만 잉크에 꾹 찍은 것처럼.
부딪히고 넘어지며 세계와 가장 먼저 맞닿는 부위에,
그의 몸의 모든 모서리에, 머금은 밤이 뚝뚝 떨어진다.
누구나 넘어지면 까만 멍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지구가 온통 까만 밤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주머니
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증명한다.
지구의 질량에 비하면 머리카락 한 올보다 가벼운 한
사람의 체중 정도로 땅을 꾹 짚어도, 멍처럼 까맣게 묻어
나오는 밤이 확인 가능하다.
무수히 넘어지는 그의 몸속엔 이미 빈틈없이 밤이 들
어차 있다.
그는 몸에 가득 찬 그 밤으로 어디로 가서 무슨 이야기
를 쓸까?
과거의 미래인 현재, 미래의 과거인 현재는
세계 안팎이 온통 까매서 아무도 그의 아름다운 까만
글자들이 자아낸 시편들을 못 보겠지만
먼 미래의 그들이라면 그가 시로 전한 신호를 받아 볼
수도 있다.
그들이 보통 쓰는 것보다 1.5배쯤 커다란 글씨로 정성
껏 씌어진 시인의 생존 신호를 어쩌면, 그들이 끝내 발견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또한 안타깝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김중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