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힘이 세다
유령 4
과거는 흘러가지 않는다
과거는 팔뚝에 푸른 ‘反共’을 새기고
뿔 달린 짐승을 꿰뚫은 화살 문신을 하고
순대를 뺀 순대국을 천원 덜 내고 먹는다
반공은 생존,
생존은 여전히 총탄이 빗발치고
시체와 선혈과 유령이 아우성하는
공포의 미궁인데
과거는 한동안 서울엘 못 나갔다
반공 평생 하고 다녀도 생계는 어려워서
뚝배기 바닥을 긁으며 버럭,
과거는 힘이 세다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망할 좌익 새끼들
국물이 적다고 투덜대다 울컥,
과거는 힘이 세다
한 잔 남은 소주를 핥아 먹으며, 빨갱이는
씨를 말려야 해,
과거는 힘이 세다
나라만 사랑했는데, 과거는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미래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과거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
죽도록 고생했는데, 과거는 다 쏴 죽이고 싶다
과거가 사라질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빨갱이가 나타날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과거가 나타날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일용할
빨갱이들이 사라질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좀 힘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동네 빨갱이는 체제를 대신해서,
괴력을 발휘해서 과거에게
소주를 한 병 산다
과거는 일흔아홉, 문득 동네 할아버지로 돌아와
하얗게 틀니로 웃는다
둘은 마주 보고 영정처럼
힘없이 웃는다
부들부들 손 떠는 적개심이여
붉은 노을은 빨갱이 천지로군요 다행이군요
무언가, 무언가 간신히 흘러가고 있는 듯한 석양
다 쓰러져가는 국밥집
나무는 간다
이영광, 창비시선 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