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임금이 죽인 사례는 와전된 내용으로 보입니다. 세조때 선왕들이 얻지 못한 물소를, 류큐 대내전에서 2마리를 얻게 됩니다. 이때 세조는 날씨가 추우니 웅천에서 키우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올려보내라고 합니다. 그후 봄이 되서 올려보내고 사복시에서 키우게 됩니다. 이후 물소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관계로 와전 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300마리에 대한 기록은 찾지못했습니다만 우선 세조때부터 성종 초때까지 각 고을에서 합산 70여마리가 태어났다고 했으니 성종 이후의 일인거 같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군역의 일환으로 우마를 집집마다 키우는데 물소는 다른 우마랑 다르게 농사를 거의 못하고 심지어 상해를 입히니 이로 인한 폐단으로 면제하기 위해 돈을 주거나 섬에 유기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연산군때는 아예 섬으로 보내어 농사를 짓게하자고 명도 내리고 중종때는 신하들이 사복시에 있는 물소의 폐단이 심하니 버리자는 주청도 합니다.
다만 이와 별개로, 화약무기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각궁 제작은 고종때까지 꾸준하게 보이는데
이는 첫번째 조선시대 화약무기는 발사간에 텀이 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는 활은 계속해서 필요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보병보단 기병의 경우 소지되는 것이 제한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화약이 조선시대에 자체적으로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하게 된 시점은 숙종대로 이후 외적으로 큰전쟁이 없었다는 점,
또한 큰 전쟁이 없었기에 수성위주의 무기 체계로 구축되어 안정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는데 큰 의의를 뒀다고 볼수있습니다.
보호무역에 따른 재료 문제, 군역, 무과, 전통까지 건들이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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