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에이티식스-, 그대 걷는 곳이 비록 전장일지라도
86 -에이티식스-,
그대 걷는 곳이 비록 전장일지라도
*애니메이션 2쿨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산산조각이 나서는
그, 혼탁한 수정체에는 비치지 않는 미래
-86 -에이티식스- op-
유색인종은 인간취급 조차 해주지 않는 산마그놀리아 공화국.
아직 미성년자의 나이에 전장으로 내몰린 이들, 에이티식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최전선에 던져진 소년의 눈에 비치는 내일은 무엇인가.

86 -에이티식스-는 요즘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힘든 감성의 밀리터리 SF 애니메이션입니다.
전쟁은 이제 아이들에게 너무 먼 소재라며 건담시리즈 조차 전쟁에 대한 테마를 줄여가는 시대에 우생학과 유색인종 학살, 소년병 등 현실의 전쟁을 기반으로 한 설정들을 밀어붙이는 그런 작품이죠.
오늘은 86 -에이티식스의 주인공이자 스피어헤드 전대 전대장 신에이를 중심으로 잔혹하고 차가운 배경 속에서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신에이는 아직 세상을 천천히 배워 나가야할 미성년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전장으로 내몰린 소년병이죠.
누구보다 우직하게 기계부대 레기온과 전투를 벌이는 냉혈한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동료의 죽음을 끝까지 기억하며 매듭지어주는 착한 사신이고
가장 앞서 나아가는 선봉장이자 언제나 가장 후미에 홀로 남겨지는 어린 아이입니다.

그런 신에이가 바라는 목표는 먼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레기온에게 잡아먹혀 자아가 이식당하고 끊임없이 황야를 떠돌아야하는 형의 망령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떨결에 주어진 목표도 있습니다.
탁월한 전투센스와 이능력인 탐지능력으로 수도 없이 많은 전장을 거닐면서도 살아남았기에 맡겨진, 죽음의 문턱에 있는 동료를 직접 사살하는 사신으로서의 목표 말이죠.

인간의 뇌를 먹고 자아를 이식하는 레기온의 잔혹한 특성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잡아먹히면 그대로 전장을 떠도는 망령이 되는 터라 끝끝내 살아남는 신에이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자아가 이식되면 레기온 전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이미 떠나보낸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지독한 문제가 있기에 신에이가 사신역을 맡는 것은 분명 합리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신에이가 전장을 벗어나길 주저하게 되는 저주로 작용하는 무거운 짐이죠.

절대 악이라고 할 수 있는 공화국과 에이티식스 간의 갈등, 티 없이 맑은 이상을 가진 레나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위선을 깨닫고 점차 성장해나가던 시기에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에 이를 과정 정도로 눈 감을 수 있었으나
제 손으로 형의 성불을 이루고 그 다음을 바라봐야 하는 상황에 놓인 신에이에게 이제껏 걸어온 전장은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목줄이 됩니다.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멸망의 날. 아직 감지되지 않은 레기온의 군세가 총공세를 퍼붓는 그 날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공화국의 시야를 벗어나 떠날 땐, 죽음을 전제로 한 전진이었기에 잠시나마 평온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이 급변하며 불안이 찾아옵니다.
바로 레나가 꿈꾸던 이상향에 가장 가까운 장소, 연방으로의 편입말이죠.

레나가 가진 이상주의는 분명 훌륭하지만 현실적으로 현 공화국 상황에선 그걸 이룰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화국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면서 그 대상을 백계종으로만 한정해 유색인종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호의호식하는 동정의 여지 하나 없이 썩어빠진 수뇌부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렇기에 공화국에서 온실 속 화초로 키워져온 레나는 아버지와 86구역을 직접 목격하며 차별에 대한 것을 인지해 개혁을 실천하고자 열심히 뛰어남에도 끝내 공화국 전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연방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리더 아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인종,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약자들을 보호하며 목숨 바쳐 싸우는 이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약속하는 그런 곳이죠.
최후의 전투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나선 싸움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된 신에이는 얼떨결에 얻게 된 평화로운 일상에 오히려 불안을 느낍니다.
그토록 바라던 목표를 이루고 이젠 누구도 그를 내몰지 않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결국 제 발로 다시 그 잔혹한 전장으로 되돌아가죠.

함께 연방으로 온 에이티식스들은 그들을 가축 취급하며 잔혹한 짓을 벌이던 공화국에서도, 과거를 불쌍히 여기며 동정하는 연방에도 자신들이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내심 부러워하던 전선 뒤 평화로운 수도 생활을 즐기는 한편, 그런 일상에 위화감을 느껴 ‘스스로’ 다시 군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되죠.
서부 너머의 세상에 도달하지 못한 전우들을 위해, 아직 존재하는 레기온의 위협으로부터 맞서기 위해. 각자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다시 군복을 입고 전장으로 나서게 되는 거죠.
하지만 단 한 사람 신에이는 조금 다릅니다. 누구보다 침착하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속이 텅 비어버려 싸우는 이유조차 이젠 남에게 맡겨야할 지경에 이르러버렸거든요.

연방에서 만나게 된 프레데리카와의 대화 끝에 그녀의 기사 키리야의 망령을 성불시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긴 하지만 이건 사실상 허울뿐인 목표에 가깝고 신에이에게는 확실한 목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당장 목표로 삼은 키리야는 제국군의 편에서 프레데리카를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싸우다 절망하고 결국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지금의 신에이가 걷는 길 끝에 위치하는 그런 인물이죠.
프레데리카가 키리야와 신에이를 겹쳐보이는 것은 전투센스나 같은 일족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런 비슷한 행적 때문이기도 합니다.

키리야의 망령이 모르포의 모습으로 인류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분석 상 수도까지 사정 범위 안에 들어오는 최악의 형국에 에이티식스들은 다시 전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저 자폭을 위한 이전과 달리 인류 전체의 흥망을 좌우할 최후의 수단이자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나서게 된 것이었으나 신에이에게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목표를 이루고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있던 신에이에게는 어차피 나서는 전장이 어디 던 그저 자신의 묫자리가 될 후보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이번에도 결국 같은 결과를 맞습니다. 따라오던 동료들은 모두 사라졌고 전장에 홀로 남아 최후의 적을 상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 생각했던 것도 잠시 리타이어 되었다 생각한 라이덴, 키리야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건 프레데리카 그리고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지원사격으로 이번엔 드디어 홀로 쓸쓸히 임무를 완료하는 것이 아닌 모두 힘을 합쳐 적을 쓰러트릴 수 있게 되죠.
마지막 순간 자신의 묫자리를 찾은 듯 함께 산화하려는 위험한 일격을 감행하지만 또다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과거의 자신을 이끌던 형의 망령이 신에이를 기적적으로 구했듯 마지막 순간 현재 자신이 걷는 길의 끝에 먼저 도달한 키리야의 망령이 아직 다른 길을 택할 기회가 있는 신에이와 프레데리카를 도왔거든요.

또 다시 홀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신에이는 정신을 차리곤 절망하지만 이번엔 결말이 다릅니다.
그를 따르던 동료들은 먼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만류에도 목숨을 걸고 도움을 주었던 어린 소녀 프레데리카도 멀쩡히 살아남았으며
끝끝내 전장에 남아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여 결국 그 걸음을 따라 잡은 레나 또한 그의 바로 앞에 서있었죠.

신에이는 동료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철조각 더미를 무덤삼아 지키는 묘지기, 자신의 손으로 수도 없이 많은 86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신이자 일생의 목표를 달성하고도 살아남아 떠도는 망령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전장으로 되돌아왔고 또다시 자신의 묫자리를 찾아 해매며 점차 깎여나가던 영혼조차 눈치 채지 못하는 어린 소년이었죠.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잔혹한 레기온의 침공은 앞으로도 계속되고 신에이 또한 다시금 전장으로 나서겠지만 그건 단순히 그가 그곳을 가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동료들을 위해, 지켜야할 소중한 이들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이상을 관철한 채 생사도 모를 자신의 의지를 이어 결국 어깨를 나란히 할 자리까지 도달한 어떤 한 사람과 함께 ‘평화로운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서죠.

이제 신에이는 진정한 목표를 찾고 순수히 자신의 의지로 전장을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대 걷는 곳이 비록 전장일지라도 바라보는 곳은 그 너머여라.
비록 이루기 힘든 이상, 어려운 목표, 평범한 이유 그것이 어떤 것이든 끝없이 늘어선 황야가 목적이 아닌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수단이기를. 86 -에이티식스-가 말합니다.
"저자가 나아가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풍경이 있다.
저자가 나아갈 길은 그대가 앞서 거닐었던 길이지.
그러하다면 그대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겠는가."
-프레데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