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탈은 자신을 무학대사라 소개한다.
비록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은 아직 내가 보지못한 것들로 가득한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였다.
나는 지금쯤이면 분명히 고래의 뱃속에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내가 물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는 것 같은, 마치 고래의 안에서 바다의 세상을 훤희 들어다 보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여름의 하늘을 옮겨 노은듯한 바다의 물결들은 실타레처럼 내가 누워있는 주변을 훑어 지나가고, 이름을 모두 셀 수 없는 물고기때들은 나선을 그리며 위로, 위로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천장에서 반짝이는 별빛들의 유난한 반짝거림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껄껄껄, 고래가 무엇을 집어 삼켰나 했더니 네 녀석인 모양이구나."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에 황량하게 일어나 뒤쪽을 처다보았다.
"이, 이게 무슨?"
내 뒤에 있는 것은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노인 탈이었다.
사람들이 얼굴에 쓰는 나무로된 바로 그 탈이다. 하지만 그 탈을 쓰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걸려 있지 않은채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입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웃음을 짓고 있는 탈의 표정은 원래 부터 저 것 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탈은 마음시 좋기로 유명한 전설 속의 100살먹은 노인처럼 온화한 얼굴로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눈가의 주름살이 깊어지며 내개 물어왔다.
"너 날 아느뇨? 모르느뇨?"
"당신은 누구죠?"
내가 되물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탈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떼낏! 이 건방진 꼬마녀석아. 어른의 존함을 묻기전에 네 놈의 정체를 말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냐."
"아. 전..."
그때였다.
입을 때려던 순간에 머리에 돌을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되버려서 아무말도 나올 수 없었다.
나는 누구지? 내가 누구였지?
그런 질문들이 무의식적으로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겨우 막아내고 웃음소리가 나는 앞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탈은 무엇이 흡족한지 완연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 자신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야. 이곳은 망각 고래의 뱃속이니까."
"...망각 고래?"
"이곳은 망각 고래의 뱃 속. 들어온 자는 누구든 자신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을 빼앗기게 되어버리는 곳이자. 도원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곳이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목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콧등에 부드러운 꽃 잎이 떨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탈과 내 옆에서 은은히 빛을 내고 있는 커다란 무엇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복숭아 나뭇가지로 둘러쌓인 것이 탈의 말대로 문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복숭아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 잎들이 바람에 떨어져, 천천히 이 주변에 흩날리고 있다.
"그리고 내 이름은 무학. 더 이상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자, 도원의 세계로 가는 이 문을 지키고 있는 자이기도 하지."
"무학?"
"무학 대사라 불러라 이 어리석은 놈아!"
무학 대사의 호통에 잔뜩 움츠려지고 말았다.
도대체 이 곳은 어디란 말인가,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에 대한 기억은 내가 어떤 어둠속에서 섬도 집어삼킬만한 고래의 입에 집어 삼켜졌다는 것 뿐이었다.
"대, 대사님."
탈이 보이지 않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의 세계란 것은 무엇인지..."
"이런 바보같기는 그것도 모르는 것이냐. 신선들이 사는 세계를 바로 도원의 세계라 하느니라. 바로 그곳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란 얘기고."
"그런 곳에 제가 어째서."
"그거야 내가 알 길이 있겠냐. 이놈아"
탈의 얼굴을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아도 그 얼굴에서는 도저히 다른 어떤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있었으나 벌려진 입과, 초승달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눈동자는 공허했다.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다."
내가 황량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탈이 말했다.
"스스로의 운으로 도원으로 향하는 '진짜 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이 아니라, 천운으로 찾는다고 하여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뿐이지."
그리고 탈은 "그러니 감사해라." 라고 말하며 바람처럼 내 앞으로 성큼 미끄러져 와서 내 얼굴의 앞에서 턱을 움직인다.
"도원의 문을 지키는 자로서 너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마. 자ㅡ."
무학 대사가 말을 채 꺼내기 전에 나는 끼어들었다.
"저는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학 대사의 미움을 받아버리고 만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반드시 이것은 미리 말해야만 한다.
"다, 단지.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무학 대사에게는 어떻게 들렸던 것일까.
전 세상의 금은보화를 끌어다 모은 것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신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차는 바보에 대한 비소?
아니면 그런 기회를 기껏 선사해준 무학 대사 자신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여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학 대사의 표정.
내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 생각대로 지금도 한치의 변화도 없는 그 얼굴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한탄, 어리석은 아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쓴 웃음소리를 내고 무학 대사가 묻고 나서야 나는 그 얼굴의 숨은 뜻을 알게 되었다.
"어리석은 아이야, 그래서 그리 돌아가고 싶다는 그대의 집은 어디누? 그대를 반길 사람은 어디에 있뇨?"
"아."
나는 그만 탄식같은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곳은 망각 고래의 뱃 속.
무학 대사의 그 말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쩌다가 지금 이런 곳에 다다른 것인지, 심지어 나는 내가 누군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무학 대사가 자비를 배풀어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준다 하더라도 내가 돌아갈 곳이 어느 곳인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곳이 정말 신선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 있는 장소라면 이 곳도 분명히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공간.
신선의 세계로 함부로 들어갔던 이가 현실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수백년이 지난 후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학 대사와 내 옆에 있던 복숭아 나뭇가지로 되어 있던 문을 지나가면 긴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이 모두를 꿈이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내가 기억도 못하는 집이란 장소로 돌아갈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지금으로서는....하지만 만약 무학 대사의 말대로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올렸을 때였다.
내 코 앞에는 이미 도원으로 향하는 문이 굳건히 서있었다.
손바닥을 들어 살짝 그 문을 향해 집어 넣어보았다.
복숭아 빛깔의 투명한 빛으로 손이 들어가자 내 손은 사라졌고, 따스한 감각이 마치 전기처럼 모든 신경을 따라 몸속 구석구석 뜨겁게 스며들었다.
이 문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신선의 세계리라.
그렇지만 아직 그곳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이놈아. 어른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렇다. 방금 전 무학대사가 내게 가로막혀 하지 못했던 말.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기회를 주겠노라고."
"기회...."
신선의 세계로 향하는 방법이 그리 간단할리는 없다는 것처럼 무학 대사가 이어 말했다.
"내가 낸 문제에 어찌 답하느냐에 따라 너는 도원의 세계로 갈수도, 아니면 이곳에 평생 남아 나의 말동무가 될 수도 있다는 이 말이다."
그제서야 나는 무학 대사의 뒤 벽에 무수히 피어있는 산호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공허한 눈동자들.
평생동안 영생을 쫓아 다니다, 그것의 문전 앞에서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만 그들의 눈동자들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는 듯했다.
무학 대사와 그들은 내 대답을 원한다.
"자, 질문이다."
종언을 고하는 듯하듯이 무학대사가 말을 꺼냈을때는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이 맺혔다.
"아이야 너의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고래.
마치 나를 집어 삼킴 고래같이 거대하고 끝을 알 수 없는 무학대사에게 나는 순간 그렇게 대답해 버릴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앞의, 무학 대사의 뒤에 있는 무수한 산호초들의 손사례가, 바람에 흔들리는 산호초들이 그것은 답이 아니라, 마치 모든 것을 망각했을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내 눈에는 무학 대사는 무엇으로 보일 것인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돼지?"
"예, 돼....돼지."
내 대답에 무학 대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고, 나는 몸을 움츠린채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무학 대사를, 아니 무학 대사의 뒤 편의,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남겨 버린 껍데기들을 바라보았다.
저리도 많은 이들을 탐욕스럽게 집어 삼킨 주제에 그 껍데기 조차 소화시키지 못하다니, 나의 눈에는 이 공간이, 이 망각 고래의 뱃속이, 그리고 무학 대사는 탐욕스러운 돼지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제 눈에 무학 대사는... 돼지로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무학 대사의 심경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단 말인가. 그런데 어쩌자고 그렇게 대답했는지 조금 있으면 무학 대사의 호통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아니, 호통이라면 자비로운 거겠지.
당장 도원의 문을 닫고는 내 과거를 갉아 먹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라고 하기에는 그 소리가 너무나 크고, 웅장했다.
고래의 뱃속이 쩌렁쩌렁 울리고, 땅이 진동까지 해서 이대로 이 공간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의 움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가 멈춘 것은 그로 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두 귀를 막고 있는 손을 때지는 못한 채 눈을 살며시 뜨자 무학 대사는 더욱 즐거운 듯이 나를 향해 턱을 위, 아래로 왔다 갔다 했다.
"경(鯨: 고래 경) 단(旦: 아침 단) , '경'의 '단'이란 이름이 좋겠구나. 이제부터 도원의 세계에서 너의 새로운 이름은 '단'이니라."
내가 어리둥절하니 무학 대사는 추가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아침에 고래에게 잡아 먹힌 놈이란 뜻이니라. 내가 직접 주어진 이름이니 소중히 하고, 다른 가짜 놈들의 고래에게 잡하 먹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빨리 사라지거라 이 놈아."
손을 뻗어 도원의 문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팔의 잔상이 먼지처럼 바람에 쓸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성큼 발을 내딛자 발도 마찬가지로 모습을 감추었다.
반쯤 몸을 들이밀고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자, 역시 그 자리에는 무학 대사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희미한 얼굴을 뒤로 하고 나는 복숭아 잎들을 따라 도원의 세계로 걸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