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기전에 쓰고 있던건데 지금은 설정이나 그런건 그다지 기억은 안나고 남은게 꼴랑 이거네요~
제 후배가 보고는 이건 판타지가 아니라 그냥 소설이라고 했던게 기억 납니다.ㅎㅎ
사실 문학같은 판타지를 쓰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아예 판타지가 아니라니....ㅠㅠ
한번 읽어보고 평가한번 해주세요~
전역후에는 아예 판타지를 안 보게 되고 쓰지도 않았는데 평가가 나쁘지 않으면 한번 이어서 써볼까 합니다.^^
1
한 밤 중의 산에서 자신의 방향감각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더군다나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내려칠 것만 같다. 하즈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빌어먹을 자식. 수행원이라면 항상 옆에 붙어있어야 할 것 아니야? 이런 산중에서 죽으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최후. 내 시체는 산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제일먼저 늑대 같은 들짐승들이 내 살을 발라 먹을 것이고 낮이 되면 까마귀 따위의 날짐승들이 내 눈알을 두고 다툼을 벌이겠지, 뼈에 붙은 찌꺼기들은 개미들이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가져가고 뼈만 남은 내 유해를 지나가던 여행자가 보고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런. 여행자는 짧은 감상을 한 번 내뱉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겠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얼마 전에 라투힐의 접경지역을 지나는데 거기서 뼈만 남은 해골을 봤지 뭐야. 아이고 저런.
순간 사위가 밝아졌다가 이내 한치 앞도 분간 못 할 만큼 어두워진다. 그리고 잠시 후, 천지가 진동한다.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분명 비가 쏟아질 것이다. 나는 서둘러 걷는다. 다시 한 번 번개가 친다. 그리고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질척한 바닥은 안 그래도 허약한 내 체력을 더욱 깎아 먹는다. 하즈는 무사한 걸까? 금방 돌아오겠다더니……. ‘왕자님은 엉뚱한 길로 가는 데에는 정말이지 마계, 아니 전 대륙을 통틀어 최고일 겁니다.’ 건방진 자식, 빗물이 짜다. 왕궁에서 허구한 날 길을 잃는 내게 하즈가 처음으로 한 말에 나는 감동보다는 묘한 굴욕감을 느꼈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고 하는 말이 조롱이라니. 건방진 자식, 지금은 그 녀석이 몹시도 그립다. 몇 시간 전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산 짐승, 나는 하즈가 시키는 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차라리 그 때 내가 하즈와 같이 싸웠다면…….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뛰어간다. 산 중에 통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 있는 것을 본 나는 그만, 튀어나온 돌부리를 보지 못 했다. 거의 내 신장만큼 날아간 나는 오두막 앞에 설치된 목책에 머리를 부딪쳤다.
“누구세요.”
불안이 담긴 여자의 목소리. 빼꼼히 문이 열린 오두막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민다.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낮선 천장.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작은 창이 나있다. 아무튼 살았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가 심하게 지끈 거린다.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자 머리에 감긴 붕대가 손에 잡혔다. 아, 머리를 부딪쳤지. 좀 더 누워있기로 했다. 이 집의 주인은 잠시 어딘가로 나간 듯하다. 누워있는 동안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즈는 어떻게 됐을까? 마계를 나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혼자가 되다니. 왕위계승시험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왕위계승시험, 왕자 혹은 왕자들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일종의 시험을 치른다. 시험의 목적은 적자를 후대 왕 후보로 뽑거나 왕자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 주가 된다. 다행히도 나는 형제들이 없다. 시험을 치루는 왕자는 대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배우자를 찾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우선 하즈를 찾는 것이다. 창문으로 햇볕이 비춘다. 모포에 덥힌 다리가 따듯하다. 오두막의 문은 심하게 낡은 것인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놀란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바람에 머리의 붕대가 풀려 흘러내렸다. 앳된 소녀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쳐다보고 있다. 찰박거리며 소녀의 손에 들린 양동이 안에서 생선이 수면을 튀겼다.
“붕대가 풀렸네요.”
소녀가 붕대를 다시 둘러준다. 처음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소녀가 거울을 비쳐준다. 여전히 엉망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생선을 사왔거든요.”
머리를 뒤로 묶는 소녀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대체 어디서……. 잠깐, 아주 익숙한 모습이다. 그래 소녀의 모습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 또한 인간의 숙명, 노화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150여 년 전, 어머니는 82세의 나이로 돌아 가셨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내 손을 잡아 주셨다. 그때의 그 눈빛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때의 나는 고작 인간의 기준으로 60세를 조금 넘겼을 때였다. 그래 마왕들은 저주받은 존재야. 나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선대도 모두, 우리는 저주 받았어. 오랜 시간을 산다는 것은, 팔팔한 몸으로 사랑하는 이가 늙고 병들어 죽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분명 저주받은 일이다.
2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난 그 날은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던 겨울의 절정이었다. 게일제국, 대륙의 최 북방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륙의 삼분의 일을 자국의 영토로 복속시킨 거대한 나라. 대륙 공동력을 쓰기 전에 제국이 미치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넓은 초원지대에서 건국된 나라는 강력한 기마부대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치렀고 초대 왕이었던 게일은 몸소 전장의 지도자가 되어 활약했다. 그의 사후에 후임국왕은 그의 이름을 따서 수도의 이름과 왕국의 이름을 지었다. 게일제국의 수도가 있는 북방의 얼어붙은 초원에서 아버지는 수행원을 잃어버리고 추위와 두려움을 안고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초원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초원늑대들은 아버지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며 집요하게 뒤를 따랐다. 추위는 둘째 치고 늑대들 때문에 아버지는 잠시간 눈을 붙이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거의 사흘간을 뜬 눈으로 추위와 싸웠고, 공포와 마주해야 했으며 늑대들과 인내력을 겨뤘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주체가 되지 않았고 시야가 가물가물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새파랗게 어린 시절,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나의 할머니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구슬픈 울음을 우는 어린 송아지 같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환상, 창백했던 초원은 봄빛으로 물들었고 같이 소풍을 나온, 아직 젊디젊었던 할머니는 어서 오라며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웬 일인지 아버지는 눈물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품에 안긴 아버지의 눈물을 손수 훔쳐 주며 괜찮다고 이제 편히 쉬라고 말했다.
눈을 뜬 아버지는 화려한 무늬의 천장을 보고 이제 살았구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무슨 남자가 그리 눈물이 흔해요?”
침대 옆에서 보던 책을 덮으며 웃음 짓는 여자를 보고 아버지는 단번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느슨해진 긴장의 틈을 헤집으며 들어찬 그녀의 웃음, 하현달을 닮은 눈매, 화려한 조개 보다 아름다웠던 눈꺼풀 속에 빛나는 눈동자, 나의 어머니였다.
“아…….”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버지 당신이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런 바보 같은 당신의 행동에 조용한 미소로 응할 뿐이었다.
“여기는 어디죠?”
어머니가 그 작은 입을 움직이며 대답할 때 당신은 귀머거리가 되었다. 장미꽃잎을 연상케 하는 그녀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는 모습, 차분한 목소리, 당신의 정신은 아득해졌고 어느새 당신은 그녀의 순결한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기습적인 입맞춤. 당황한 어머니의 몸은 시체처럼 굳어졌다. 시체의 심장은 새 생명을 갈구하듯 맹렬히 요동쳤고 창백했던 안면은 붉게 물들었다. 영원 같던 잠깐 동안의 시간, 서로를 이어주던 짧은 입맞춤.
“여기에 당신과 저만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세요.”
크게 놀랐음에도 차분했던 목소리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 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머니가 나간 후 다시 잠이 들어버린 아버지는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양손에 들린 쟁반에는 멀건 스프가 들려있었다.
“이곳으로 실려 와서 거의 이틀 동안 잠만 잤어요.”
하녀는 이제 갓 초경을 지났을 법한 앳된 소녀였다.
“공주님이 깨어나셨다고 해서 음식을 준비해왔어요.”
하녀의 말이 맞다면 아버지는 거의 닷새이상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기 허기가 진 아버지는, 급하게 스프를 떠넘기다가, 뭐? 식욕이 뚝 떨어졌다. 여기에 당신과 저만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세요. 귓속에 이명으로 울리는 그녀의 말, 어머니는 게일왕국의 제 1왕녀였다.
3
소녀는 익숙한 솜씨로 요리를 한다. 생선의 내장을 발라내고 비늘을 벗긴다. 대가리가 잘린 생선은 뻐끔뻐끔 주둥이를 놀렸다.
“자 여기, 가시가 목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
갈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에게 뼈와 생선의 머리, 내장이 담긴 그릇을 내려준다.
“아직 이름이 없어요. 어제 데려온 녀석이거든요.”
“시몬”
“예?”
“시몬, 그게 좋겠어.”
나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시몬, 그게 좋겠어. 아버지는 나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시몬이요? 그래 시몬. 어머니는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다 됐어요.”
식탁에 생선살로 만든 스프가 놓여진다. 냄새도 맛도 그리 나쁘지 않다. 마야. 소녀는 자신을 그렇게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마야, 산중에 홀로 사는 소녀, 여섯의 어린나이에 하나 뿐인 어머니를 잃은 아이
“혼자 산지는 이제 햇수로 2년이 조금 넘네요.”
대륙의 몇몇 나라는 고아, 혹은 극빈층의 자녀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운영한다. 입학은 부모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자녀의 양육을 포기했을 경우, 부모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는 경우에 가능하다. 해당지방 관리들은 일 년에 한 번 그런 아이들의 통계를 내고 입학신청을 받는다. 입학신청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일정기준에 부합하면 자동적으로 입학하게 된다. 아르펜공국은 국가차원의 공립학교를 운영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약 8년간의 교육, 마야는 올해로 열일곱이 되었다. 아버지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소녀, 아니 애초에 아버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녀 또한 알고 있을지 모른다.
“헤. 그럼 시몬이 아저씨 이름이었어요?”
“고양이 이름으로는 안 어울리나?”
“아니요. 너무 잘 어울려요.”
시몬. 어린 시절, 사랑을 담아 부르시던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사랑 뒤에 숨겨진 애달픈 그 무엇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심약해지셨다. 한 달 후 아버지는 나의 침실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눈보라가 날카롭게 몰아치던 초원의 늑대, 할머니의 환상, 그리고 어머니 당신의 이야기를.
4
그녀의 이름 이자벨.
“이자벨? 성(鋮)은 없나?”
하녀가 대답했다.
“게일왕가의 사람들은 성이 없어요. 태어날 때 미리 준비된 이름을 받아요.”
그곳은 이자벨이 겨울마다 머무르는 별궁, 별궁에는 운영을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약 서른 명으로 구성된 경비대, 몇몇의 하녀와 급사, 시녀도 없이 겨울에만 머문다는 왕녀, 그녀의 다섯 살 생일에 선물로 주어진 별궁은 넓은 초원의 한 가운데 요새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도 사용되거든요. 천만 다행이었어요.”
공주가 국왕의 부름을 받고 왕성에서의 용무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초원에서 발견한 망자처럼 떠돌던 남자, 마차를 멈추고 앞에 섰을 때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는 남자의 눈물을 훔치며 왕녀는, ‘괜찮아요. 이제 편히 쉬세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초원의 늑대는 고개를 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했다. ‘무슨 남자가 그리 눈물이 흔해요?’ 그녀의 첫 마디가 떠오른다. 몹시 창피한 기분이다. 하녀는 아버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서 놀려댔다.
일주일간의 요양으로 아버지의 몸은 점차적으로 회복되었다. 창밖의 눈발은 더욱 거세어 졌다. 그녀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분명 차갑게 얼어붙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아버지는 별궁을 둘러보며 다녔다고 했다. 이자벨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하지만 왕녀를 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왕녀의 처소는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별궁의 다른 한 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던 곳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적(赤)궁, 어머니가 머무르는 황(黃)궁은 남쪽에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이자벨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겨울이 길어지자 초원에는 봄이 왔고 해는 점차 길어졌다.
봄이 찾아오기까지 아버지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게일왕국은 1300년 가까이 되는 긴 통치의 기간 동안 속으로부터 곪아들어 갔고 국가는 쇠약해졌다. 주변국의 국지적인 침략과 노쇠한 왕을 둘러싼 암투, 그리고 이자벨은 별궁의 마지막 봄을 즐기고 이웃국인 길트에 사는 국왕의 차남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있었다. 아버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제국의 수장은 궁여지책으로 대륙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는 길트와의 정략결혼을 생각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발견한 날, 어머니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상념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별궁의 집사가 따로 내어준 자신의 방 안에서 아버지는 생의 처음으로 찾은 사랑이 곧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봄이 지배하는 초원은 겨울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초록의 대지. 곧 있으면 꽃이 만발할 것이다. 그 꽃이 다 지면 그녀는, 떠난다. 초록의 대지위로 가벼운 복장을 하고 어린 아이와 놀고 있는 왕녀의 모습, 기품이 녹아든 아름다움은 왕궁의 법도를 함축하는 화려한 드레스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왕녀의 앞에 서있었다. 그토록 고대했던 만남, 하지만 아버지는 또 벙어리가 되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아이의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귀엽죠?”
“아……. 예.”
“몸이 약해서 온종일 방에만 있다가 간만에 밖으로 나와 무척 즐거운가 봐요. 인사하렴, 시몬.”
5
언제 비가 쏟아졌냐는 듯 화창한 날씨다. 무리하지 말라는 마야의 염려를 뒤로하고 장작을 팬다. 내가 걱정되는 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내 하는 양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아저씨는 따로 성이 없어요?”
“우리 집안은 따로 성이 없어. 태어날 때 미리 준비된 이름을 받지.”
“그건 몰락한 게일왕가의 전통하고 닮았네요.”
닮을 수밖에.
“마야. 너는 성이 어떻게 되니?”
마야는 히죽거리며 웃다가 입을 연다. 뭔가 득의양양한 표정이다.
“저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성이 없어요. 아마 게일제국이 몰락하고 흘러든 왕가의 사람들이 정착해서 그럴 거예요.”
“그게……. 정말이니?”
마야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때마침 태양을 가리는 구름 때문인지는 마야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깔린다.
“아니요. 성이 없는 건 맞지만 뒷말은 그냥 제가 지어낸 거예요.”
실없는 장난. 마야는 왠지 침울하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성이 없는 사람은 저 혼자였어요. 놀리는 아이들에게 저는 최대한 고매한 척 변명했어요. 봐라. 나는 게일왕족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몸이다. 너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부모가 없어 배척당하던 아이들이 모이고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배척한다. 마야의 경우는 성이 없어 배척받았다.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거나 타인보다 우월한 것이 과잉되면 무리는 자신들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배척한다.
우리는 수명은 과잉되고 또한 이름은 한 부분이 결어 되어 있다. 이름은 개체를 정의내리는 기준이다. 성은 인간이라는 개체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는 근본이다. 이름만 있는 자들은 뿌리가 없다. 나는 들었다. 뿌리 없는 자, 우리의 역사를.
6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사람들이 아직 제대로 된 정착생활을 시작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인간들의 언어는 동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규칙성은 있었으나 집단마다 쓰는 말이 달랐고 그래서, 서로간의 살육은 피할 수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타인, 그것은 공격성을 타고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위협적인 요소였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사냥했다. 돌로 만든 원시적인 무기로 서로가 서로를 공격했다. 살이 뭉개지고 머리가 주저앉았으며 부러진 팔과 다리를 덜렁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쓰러져갔다. 다른 무리를 만나면 수컷을 죽이고 암컷을 취했다. 어린 새끼 중 수컷은 버려지거나 잡아먹혔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그들은 살육을 멈추고 몽뚱이를 조아렸다. 우리는 인간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우리는, 추방자일 뿐이다. 왕궁의 그 누구도 우리가 무슨 이유로 추방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너무도 오래전의 일이고, 추방자라면 으레 추방당할 만큼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떳떳하지 못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 법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에게 물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고 농법을 가르쳤으며 천문과 문자를 가르쳤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그들의 지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을 이용하여 더욱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며 그들의 생활상은 점점 발전해 나갔다. 어느새 그들의 지식수준은 선조들과 거의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인간들은 더 이상 우리의 선조들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실력 있는 지도자들이 등장했으며 초기의 국가가 등장했다. 그리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아남은 선조들과 일부의 추종자들은 살육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륙의 끝에 있는 험준한 산맥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두 가지 길만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죽거나, 죽을지 모르지만 산맥을 넘거나. 선조들은 산맥을 넘었다. 생존자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마침내 산맥으로 둘러싸인 평원에 이르러 그들의 대장정은 그 끝을 맸었다. 고립의 시간, 난민들의 왕국은 대륙의 역사에서 비켜나와 다른 시간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왕국의 이름?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뿌리가 없다.
7
마야의 집에 머물게 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하즈를 기다린다. 마야는 거의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다. 따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돈은 어디서 나서 집에서 놀기만 하냐?”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거나, 숲을 거닐거나, 가끔 장을 보고 와서 고양이와 놀아주는 것이 마야에게는 하루의 전부인 것 같았다. 관청에서 매달 일정량의 돈을 마야에게 지급하고 있었다. 고아로 등록된 시민들은 만 십팔세가 될 때까지 일정량의 생활 보조금이 나온다.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은 여자아이가 혼자 생활하기에는 분에 넘치는 양으로. 훌륭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상공업에서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아르펜공국은 그 돈의 일부를 다시 인적자원을 양성하는데 투자한다.
“하고 싶은 일은 있니?”
마야는 이 질문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여행이요. 세계의 모든 나라를 돌면서 여행을 하는 게 꿈이에요.”
“그러면 뭔가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일 년에 한 번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관리 선발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마야는, 우선 관청에서 일하며 돈을 모을 것이라고 말한다. 책상에 앉은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쌓인 서류뭉치 안에서 잉크에 찌든 손톱을 가진, 업무에 찌들어 히스테리 가득한 초로의 여인이 떠오른다.
“아저씨는 꿈이 뭐예요?”
마야의 눈이 빛난다.
“꿈이라…….”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물었는데 소녀는 꿈을 대답하고 꿈을 묻는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말해야 할 지 꿈을 말해야할 지 잠시간 망설인다.
“내 아내와 둘이서 같은 날 늙어죽는 거.”
나는 꿈을 말했다.
다음날 마야와 함께 집을 나선다. 마야는 나에게 한가득 책을 들게 하고는 저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팔이 아프다. 관청에 딸린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그만큼의 책을 또 빌린다. 팔이 아프다. 마을은 생각보다 큰 규모였다. 마야는 시장에 들러 약간의 돼지고기를 산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마을중앙의 광장을 지난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의 입구에서 수군거리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뒤에서 까치발로 서 있다가 들고 있던 책을 내팽개치고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고개를 들이민다. 광장의 중앙에 솟은 원형의 통나무들과 그중 하나에 묶인 한 명의 죄인. 하즈는 그곳에 있었다.
8
이자벨과 시몬을 만난 다음날 아버지는 수행원과 다시 만났다. 지평선위로 수행원이 나타났을 때 아버지는 임무태만에 대한 책임을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행원을 마주한 순간 아버지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게일을 찾아라.”
수행원은 그 길로 말을 달렸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북방의 봄은 짧다. 시간이 얼마 없다. 기다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지만 아버지에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수행원의 소식을 기다릴 때와는 반대로 이자벨의 결혼날짜를 생각하면 시간은 살처럼 빨리 갔다.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아버지는 매일같이 시몬과 어울려 노는 이자벨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시몬. 게일국왕의 삼남 중 막내. 병약한 아이. 어머니처럼 따르는 그 아이를 이자벨은 진정 자식처럼 아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시몬과 실을 가지고 노는 이자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결혼인가요?”
이자벨의 손에서 별이, 네모가, 그물이 만들어 졌다. 이 와중에도 시몬은 실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요?”
“제 몸은 저만의 것이 아니랍니다.”
시몬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마침내 손가락을 걸친다. 실수다. 그물은 엉망으로 꼬였다. 아버지는 찢어진 그물만을 건져 올린 어부처럼 망연한 표정으로 둘의 곁에 서있었다.
비둘기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성의 경비병이 아버지에게 온 편지라며 전해주었다. 비둘기는 수행원이 보낸 전서구였다. 편지를 본 아버지는 공주의 처소로 쳐들어갔다. 아버지 인생에 다시없을 용감한 행동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경비병들이 공주의 방으로 따라 들어와 아버지를 결박했다. 공주가 경비병들을 힘겹게 내보냈다.
“떠납니다.”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물에 걸린 작은 새는 몸부림치며 더욱 자신을 옥죈다. 공주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가만히 있으나 몸부림치나 결과는 매한가지다. 결국은 사냥꾼의 손에 잡히게 된다. 하지만 공주는 틀렸다. 수백, 수천의 새떼는 그물의 존재자체를 부정할 것이다. 수백 수천의 날갯짓이 곧 게일 왕국을 뒤덮을 것이다. 아버지는 작은 새에게 가볍게 입 맞추고 말했다.
“돌아오겠소.”
아버지는 그 길로 별궁을 나섰다. 공주는 자신의 방에서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말을 몰고 한 시간 가량 걸었을 때 뒤에서 말을 탄 두 명의 경비병이 따라붙었다. 공주님이 당신에게 전하라는 편지요. 두 명의 경비병을 태운 말은 별궁으로 힘차게 달렸다. 말 위에서 아버지는 편지를 읽었고 말은 풀을 뜯었다. ‘잠시간 제 마음을 흔들었던 당신께.’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아버지는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달렸다.
9
정오가 될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대체 어째서. 하즈에게 음식을 주고 나오는 병사에게 나는 물었다.
“무슨 죄를 지었소?”
삼일 전 병사들은 마을주민들로부터 신고를 접수했다. 마을 외곽에 무기를 소지한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은 경비대는 즉각 출동했다. 아르펜공국에서는 법적으로 마을 내에서의 무기소지를 금지하고 있었다. 국가의 병사들만이 무기를 소지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불법적으로 은밀히 숨기고 다니거나 입구에서 1킬로미터 밖에 있는 경비초소에 무기를 맡겨야만 했다.
문제는 왕궁의 검. 왕위계승시험을 보기위해 대륙으로 떠나는 왕자의 수행원이자 경호원에게 내려주는 상징적인 검이었다. 바보 녀석.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하즈는 절름발이처럼 한 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미 경비초소는 지나친 후였다. 병사들은 경비초소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하즈를 둘러쌌다. 경비대장이 경고했다. 하즈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싸우다 죽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곧 싸움이 시작됐다. 하즈의 멀쩡한 한 쪽 다리를 겨냥하고 날아간 화살은 검 집에 막혔고 뒤이어 날아오던 화살들이 검 날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 번의 시도가 막히자 경비대장을 포함한 창으로 무장한 다섯 명의 경비대가 달려들었다. 그 중 세 명을 쓰러뜨렸지만 하즈는 멀쩡한 한 쪽다리의 허벅지가 창에 뚫리면서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싸움도중 병사들이 죽었다면 바로 죽임을 당했겠지만 쓰러진 세 명은 단지 검 집이나 주먹에 맞아 기절했을 뿐이었기에 즉결심판은 면할 수 있었다. 포박 후 경비대장은 경비초소로 나머지 한 명의 병사를 보내 정황을 살펴보게 했다. 경비초소의 병사들은 상처하나 없이 기절해 있었다.
검을 맡겼다면 손해 없이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놈의 맹세는 하즈에게서 선택권을 뺐어갔다. 검을 받을 때 수행원은 맹세를 한다. 살아있는 한 몸에서 절대로 검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맹세와 타인에게 양도및 강탈당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또 하나 검에는 피를 묻히지 않을 것을 말이다. 피를 묻히지 않는 검이라니 원로원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사항을 강조했다. 실리에 어긋난 지침, 하즈를 저렇게 만든 것은 원로원의 늙은이들도 나도 아닌 대륙인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빚어 나온 모순된 규율이다. 어떻게든 하즈를 구해야만 한다.
화석이다! 옛날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