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한쪽의 창가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하얗고 눈부신 방 한 켠에 놓인 침대 위에서 노인은 햇살을 바라보며 침잠하고 있었다. 노인은 편안한 자세로 가만히 누워 창가를 쳐다보다, 간간히 채 하품이 되지 못한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깨어나셨군요."
때마침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 가운을 걸친 젊은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노인은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햇살에서 눈을 떼어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 나이 먹도록 안경을 쓴 적이 없었고 그것을 일종의 자존심으로 여겼었지만, 지금 노인의 눈에 보이는 여성의 모습은 흐릿하고 뭉개져 간신히 여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병실 한 구석에 있던 철제 의자를 노인이 누워 있던 침대 옆으로 조심스럽게 끌어와, 그 위에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노인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말하였다.
"깨어나신지 얼마 안 되서 그래요. 아직 시력이 돌아오려면...."
"미안하오만, 아이들은 무사합니까..?"
"네?"
되려 반문하는 그녀를 보고, 노인은 짧게 한숨을 토했다. 이 병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노인이 제일 먼저 생각한 건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의 생사, 그것이었다.
"두서없이 물어봤구만. 의사 선생이라면, 내가 왜 여기까지 실려왔었는지 알겠지 싶었는데... 사실.."
"아! 알고 있어요. 그게 궁금하셨나 보네요."
이번에는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아까와 같이 웃음섞인 목소리로 노인이 가장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학교에 들어왔던 테러리스트들이라면, 전부 경찰에게 제압됐어요. 물론 학교에 있던 아이들은 다들 무사하구요. 그게 궁금하셨죠?"
"그렇소? 잘 됐군. 정말로 잘 됐어..."
그녀의 대답을 듣자 노인은 자신이 깨어난지 얼마 안 된 환자라는 것도 잊어버린 건지, 급하게 무거운 등을 일으켜 앉았다. 주름 섞인 입가가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손녀 뻘이나 될까말까한 여자 앞에서 방정맞게 웃고 싶지는 않았건만, 그녀에게서 아이들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잘 됐어.. 정말로.. 허허허.."
"그렇죠. 잘 된 일이에요."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아직도 웃음을 짓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다소 흥분한 것 같은 노인의 기분이 가라앉으려면,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생각이 맞은 듯, 노인은 웃음을 그치고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고는 그녀에게 얘기하였다.
"아무튼.. 의학이란게 참으로 대단하구려. 나는 그 폭발 속에서 살아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오. 그런데 나도 이리 무사하고, 그 아이들도 무사하다고 하니.."
"그럼요. 지금은 몸이 좀 무거우시겠지만, 괜찮아지시면 다시 일도 하실 수 있을 거에요. 틀림없이요.."
여운을 남기는 그녀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눈이 다소 나아진 것인지, 그녀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왔다. 치렁하게 늘어트린 긴 금발 사이로 앳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고, 간간히 그 머릿결에 햇살이 부딪혀 백사장의 모래처럼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노인은 그제서야 그녀가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고, 자신의 목숨을 살려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 아니에요. 당연한 일인걸요. 그보다 환자 분.. 아니,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내가 이래뵈도 학교에서.. 아니지, 그 젊은 나이에 의사가 되셨는데 드릴 말씀이 아니구만. 허허.."
눈앞에서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로 웃고 있는 노인이, 학교의 교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노인의 농담에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다시 얘기를 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사람들한테는 영웅으로 불리고 있어요. 알고 계세요?"
"아니, 내가요? 내가 왜.."
"그야.. 마지막에 그.. 테러리스트가 던진 폭탄을 몸으로 덮으셨으니까.."
"아.."
얘기를 듣던 노인이 얼굴을 찌푸리자, 주름진 얼굴에 한층 주름이 더해졌다. 갑작스레 병실 안은 깊은 바다 속이 되기라도 한 것 마냥, 숨소리마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이내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하였다. 좀 더 시간을 들였다가 늦게 물어볼 걸 바보같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떠올리기도 싫겠지. 사실 노인의 몸 상태가 어떠했는지 가장 잘 아는 건 그녀였다.
"사실 나도 그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만 딱히 내가 영웅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걸 가지고 입방아 찧을 일 있나, 거 사람들 참..."
"그건 몰라서 하는 말씀이세요. 선생님이 다니시던 학교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학교잖아요? 거기 다니는 아이들도 특별한 아이들이고.."
한참 만에 간신히 열린 노인의 입이 다시 닫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화제를 돌려 노인을 급하게 추켜세웠다. 노인은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투였으나, 자기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다. 그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던가. 그 학교가 어떤 학교던가. 진작에 은퇴해서 손주 재롱이나 봐야 할 나이에, 아이들에게 학업을 가르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요. 세간에서는 구세대에 뒤떨어졌다거나, 동물원에 있는 동물 보듯이 하기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뭣보다, 어미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이제 그 곳 말고는 찾아 볼 수도 없으니.."
"선생님도 통합 이전에 태어나신 분이죠? 게다가.."
"예, 따로 개조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의사 선생님은 나 같은 사람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걸지도 모르겠구려."
조금은 비감 섞인 노인의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노인은 사람들이 인공 자궁을 거쳐 태어나고,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온갖 개조 과정을 거쳐 기계와 사람의 경계가 없어진 작금의 시대에서, 어머니의 몸 속에서 태어난 순수한 인간의 몸으로 팔십 평생을 살아 온 인물이었다. 그것이 노인에게 때로는 자부심이 되어줬지만, 지금처럼 남들 다 하는 일을 자신만 안 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소외감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다가올 때가 훨씬 많았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경찰 분들이 사건 청취를 해야만 한다고 해서요. 환자 분 상태를 봐 가면서 제가 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기에.."
"허허, 괜찮습니다. 내가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 약간 놀라는 것도 있고.. 몸이 좀 무거워서 대답에 뜸을 들인 거지, 별 뜻은 없어요. 그래, 뭐부터 시작할까요?"
노인이 찌푸려진 인상을 거두고 살갑게 웃으며 얘기하자, 그녀는 입술을 떼며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급히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기계를 꺼내 침대 옆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이 약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기계를 쳐다보자, 그 모습을 본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녹음기에요.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을 녹음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이거 꼭 취조실에 온 기분이군. 살살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사님."
농 섞인 노인의 대답에, 그녀는 잠시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같이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뻗어, 아까 전 '녹음기'라고 말한 기계를 건드렸다. 스위치의 딸깍꺼리는 소리 뒤로, 약간은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노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들려주셨으면 해요. 이번 사건 이전에..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부터.."
"그러니까, 내 인생 말입니까?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다던가, 범인은 몇 명이었다던가 그런 거면 모르겠는데 그건 왜.."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잘 알려면, 핵심 당사자이신 선생님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고 해서요. 이번 일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아, 그렇지.. 이해합니다. 내 깜빡했군. 하긴 테러리스트 놈들이 노린 건 나도 포함되어 있었을 테니. 그러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노인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옮겼다. 차가운 금속 소재일 것이 분명한 병실의 천장 뒤로, 지나온 세월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그 때는 누구나 다 겪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다시 겪지 못할 것들. 바로 노인의 지나온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