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유성의 7일 2부 19화 사명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할 수도 없고요. 다만,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내일 저녁까지는 말씀해주십시오.”
센터로 돌아왔을 땐, 벌써 늦은 저녁이었다.
“하하, 큰아버지댁은 결국 못 찾았네요.”
치아나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뭐, 지금 만나도 어색해질 것 같으니 오히려 다행일까요.”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치아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이상한 생각? 저를 그렇게 음흉한 여자로 보는 거예요?”
“......농담하지 말고요.”
아. 하고 치아나는 시선을 피했다.
“치아나씨. 설마!”
“.......프훗!”
프훗?
“후하하하핫! 장난친 건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프흐흐.”
치아나가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저라도 죽는 건 무섭다고요. 피아나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 게다가.”
치아나는 나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약속했잖아요. 두 개나!”
“약속?”
“하나! 관장님께 레쿠쟈를 보여드린다는 약속.”
치아나는 중지를 접었다.
“지금 제가 죽어버리면 그 약속을 못 지킬 거 아니에요.”
“아니, 이제 와서 그건.”
“또 하나! 관장님네 어머님과 한 약속.”
치아나는 접었던 중지를 폈다.
“네? 저희 어머니?”
“관장님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치아나는 두 손으로 내 볼을 잡아당겼다.
“므, 므흐는 그으요......?”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어머님과 한 약속을 어기게 되잖아요.”
치아나는 그대로 내 볼을 위로 올렸다.
“자, 웃어요!”
내 입꼬리 그대로 위로 올라갔다. 나는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느, 느가 울 긋 그튼-”
“아무튼!”
겨우 입꼬리가 내려갔다.
“걱정 마세요. 내일 제대로 윤진씨께 말할게요. 아, 그렇지!”
치아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걸로 우리 세계로 떨어지는 운석은 막은 거죠? 그러니까 내일은 하루 종일 놀까요? 오늘은 일찍 자고.”
“논다니 갑자기 무슨.”
“맛있는 거 먹고, 가고 싶은 데 가고, 뭐 그런 거요.
저는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내일이 마지막이라고요?”
“......뭐, 그러시다면야.”
“그럼 내일 봬요.”
그 말과 함께 치아나는 센터 숙소로 쏙 들어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센터 로비에서 밤을 새고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밤중에 몰래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
“관장님, 괜찮아요? 뭔가 퀭한데.”
“아, 괜찮아요.”
결국 밤에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괜한 걱정이었나.
“그래서? 마지막 날에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으음, 몇 가지 생각해둔 건 있어요. 일단!”
그 후, 트로피우스는 나에게 잡힌 날 이후로 가장 바쁜 날을 보냈다.
오전엔 용암마을에서 온천.
“하아, 기분 좋네요. 이거.”
다 벗고 있진 않지만, 혼욕이라 제법 민망했다.
점심엔 보라키친.
“빌리지샌드세트랑 코일야끼 주세요!”
치아나는 내 두 배는 되는 양을 먹어치웠다.
오후엔 검방울시티, 에 가려고 했는데.
“검방울시티 관장님이 은송씨예요? 그, 그럼 좀.......”
껄끄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은송이 있으면 공중날기도 못 쓸 것 같다.
그래서 결국 황금마을.
“오오, 바다 위에 떠 있는 마을이라니! 신기하네요!”
빠지지 않게 조심하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시간이 좀 남았다.
마지막으로 해안시티 포켓몬 콘테스트.
“꺄악! 저 피카츄 좀 봐요! 너무 귀여워!”
이야기만 들어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우승은 파비코리와 같이 나온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저녁. 다시 루네시티로 돌아왔다. 벌써 저녁이 다 되어 하늘엔 별이 박혀 있었다.
“그렇지! 마지막으로 보고 가요! 지금쯤이면 볼 수 있을 거예요!”
“뭐를요?”
“뭐긴 뭐예요. 우리가 만난 첫 날에도 본 거요.”
“첫 날에 본 거면, 포자에 기절한 치아나씨랑.”
“아, 그거 말고요!”
치아나가 볼을 부풀리다 푸 하고 빼며 웃었다.
“레오꼬자리요!”
***
“와아! 예뻐라!”
루네시티의 크레이터가 주변의 빛을 차단하고 있어서인지 다른 곳보다 별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크레이터 안쪽에 별이 박혀 있는 것 같네요.”
밤하늘을 동그랗게 가리고 있는 크레이터 덕분에 더욱 장관이었다.
확실히 이런 풍경은 루네시티에서밖에 보지 못한다. 단점이 있다면
“그래도, 여기선 레오꼬자리가 안 보이네요.”
안타깝게도, 크레이터에 가려져 정작 레오꼬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위치상으론 저기니까.”
가리킨 손가락이 크레이터에 막혔다.
레오꼬자리는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며 천천히 북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조금씩 밤하늘이 아래로 넓어져갔다.
하지만 거의 북쪽 끝까지 가도 결국 레오꼬자리는 볼 수 없었다.
“으음, 여기선 못 보는 걸까요.”
약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치아나를 보았다. 치아나는 그대로 하늘만 보고 있었다.
“치아나씨?”
“마지막 날, 즐거웠어요. 정말 아름다운 세계예요.”
마지막 말. 그 말에 괜히 불안감이 들었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살아가야죠.”
“살아간다라.”
치아나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시선을 가만히 둔 채 치아나가 말했다.
“화산재로 가득 한 길을 걸을 때, 관장님이 그런 말을 하셨죠.”
“네? 아, 그랬죠.”
원래 세계의 113번 도로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 반대로 자기만의 죽는 방식도 있는 거 아닐까요.”
치아나는 하늘에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빛도, 달빛도 없는 어두운 저녁이라,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저는 유성의 민족이에요. 세계를 재앙으로부터 지키는 사명이 있어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또 장난치는 거예요?”
“오늘 하루 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역시 이 방법밖에 없어요.”
“무슨 소리예요. 그걸 치아나씨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 소원! 지라치에게 빌 수 있는 소원도 하나 남았잖아요!
그걸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도 몰라요! 그럼!”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닐 지도 몰라요.”
“그래서, 확실한 방법인 자기희생을 택하겠다고요? 그런 거 인정 못 해요."
"인정 못 하셔도, 방법이 없어요."
"계속 그런 말 하면 내일이 끝날 때까지 억지로라도 치아나씨를 붙잡고 있을 겁니다!”
“후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저도 괜히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랍니다.”
치아나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각성의 사당?”
우린 각성의 사당 앞에 서 있었다. 하늘만 보고 걸어와서 눈치 채지 못했다.
“여기라면 일이 끝날 때까지 관장님을 안전하게 모셔둘 수 있겠죠.”
“하, 무슨 말씀을 하는 거죠? 제가 거길 왜 들어가겠-”
“지라치님.”
......!
“제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잠깐. 지금 뭐하는-”
“오늘이 끝날 때까지 관장님이 잠들어 있게 해주세요.”
“치-!”
치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아.......나.......”
시야도 흐릿해진다.
“고마워요. 저를 위해 그런 표정을 지어줘서.”
팔을 뻗어보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미안해요. 모두를 확실하게 구할 방법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아요.”
어둡고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 치아나의 눈가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상상력이 부족한 건 저였나 봐요.”
희미하게 들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
머릿속이 어지럽다.
지난 7일 간. 치아나를 만나고, 방금 헤어지기까지
내가 듣고 본 모든 일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레쿠쟈. 유성의 민족,
고대 포켓몬, 루네민족.
운석. 에너지.
세계와 치아나 중 하나.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천천히 정리되어 간다.
그리고-
“이봐. 일어나.”
“.......”
“후, 이봐!”
“.......”
“칫, 이거 비싼 건데.”
드륵-
입 안으로 차가운 액체가 흘러들어온다.
무의식 중에 침을 삼킨다. 침과 같이 액체도 같이 삼켜버린다. 언젠가 먹어본 적 있는 맛.
“크헉. 켁, 켁.”
아직 목 안에 액체가 남아 있던 걸 기침으로 뱉어낸다.
“뭐야, 여긴......?”
어두워서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 간혹 가다 들리는 물소리와 골뱃 울음소리.
“각성의 사당?”
내가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지? 몽롱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장면은.
“치아나씨?!”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우 일어났네.”
눈앞에 사람 형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이상한 복장만큼은 눈에 들어온다.
“치, 아나씨?”
이런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따로 또 있을 리가 없다.
“하, 다행이다. 나 이상한 꿈 꾼 거 있죠.”
솔직히 말해 부끄러운 꿈이었다.
“미안하게 됐네. 언니가 아니라서.”
“응?”
저 뒤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 덕분에 점점 시야가, 눈앞의 사람의 모습도 선명해진다.
치아나를 닮았지만, 키가 조금 작고, 단발에 눈매가 날카롭다.
“피, 피아나양?”
피아나가 왜 여기에? 아니, 설마?
‘오늘이 끝날 때까지 관장님이 잠들어 있게 해주세요.’
“설마 원래 세계로 돌아 온 거야?”
7일 째가 끝날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그런-
“미안하지만, 아니야.”
피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7일 째 저녁이야. 좀 늦긴 했지만.”
피아나는 주머니에 빈 병 같은 걸 집어넣었다.
“아무리 해도 깨어나질 않길래 만병통치제까지 썼다고.”
입 안에 쓴 맛이 남아있다.
“그럼, 지금은-”
품에서 포켓내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이 끝나기까지 몇 시간남지 않았다.
“시간 없어. 빨리 가야 해. 얼른 일어나.”
아직 얼떨떨한 채로 피아나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간다니, 대체 어딜?”
“어디긴. 하늘 기둥이지.”
피아나는 내 손을 잡고 사당의 문을 열었다.
“치아나를 구하러 가는 거야.”
***
밖으로 나오니 루네시티 중앙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피아나양이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냐니. 난 여기 살고 있거든?”
아, 그랬지.
“유성의 민족이기도 하고.
이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건지, 그걸 막기 위해 무슨 일을 하려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어.”
밖으로 나온 우리는 발밑에 물이 찰랑거리는 곳까지 섰다.
“언니랑 레인, 이 세계의 당신은 지금쯤 하늘 기둥에 있을 거야.”
“하늘 기둥?”
131번 수로에 있다던, 유성의 민족이 아니면 볼 수도 없다는 이상한 곳.
“유성의 폭포처럼 그곳도 계승이 이루어지는 곳이니까. 아무튼 서둘러.”
“자, 잠깐만요.”
잡아 끌던 피아나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치아나씨를 구하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건 구하고 나서 생각할 거야.”
“그 대가가 세계의 멸망인데도?”
“아무리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피아나는 홱 돌아보았다.
“치아나를, 언니를 또 죽게 만들 순 없어!”
“구한다 해도 운석이 떨어지면 의미가 없어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이대로, 언니가 또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피아나는 기어이 내 멱살까지 잡았다.
“당신이라면! 다른 세계에서 온 당신이라면! 언니를 구하러 같이 가줄 줄 알았는데!
이럴 거면 오늘 끝날 때까지 사당 안에서 자게 내버려 둘 걸 그랬-”
“그게 아니에요.”
“......뭐?”
“아무리 세계를 구한다 해도, 치아나씨가 죽으면 의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말장난-”
“방법, 있을 지도 몰라요.”
피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세계와 치아나씨, 둘 다 구할 방법.”
몽롱한 머릿속에서 나온, 방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이 방법.
피아나는 어느새 내 멱살에서 손을 놓았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재앙을 먼저 부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