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평 남짓한 공간에 무려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잠자리는 비좁았으며 습한 환경 때문에 칙칙한 곰팡내가 공간 전체를 매우고 있었다.
개인 물품이라고 할 것도 없이 더러운 담요와 식기들을 나눠서 썼으며 요강 같은 개념에 불순물을 담아 두는 나무통은 뚜껑도 맞지 않아,안그래도 탁한 공기를 더욱더 오염 시키고 있었다.
처음엔 극도로 경계하던 아이들도 내가 큐어 마법을 시전하며 다친 부위를 치료해 주자 어느 정도 경계심은 푸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페이가 나에게 희망을 걸어보려는 태도를 취하자 아이들도 그것에 모든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난 항아리를 앞에 두고 페이를 마주보며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럼 쓴 돈은 고작 은화 20개 정도라고?”
“그래...”
이세계 애들은 왜 하나 같이 반말일까?
엘리샤부터 시작해 페이까지 왜들 이래?
예절 있게 굴면 어디가 덧나나?
“좋아.. 그럼 이야기를 들어보지”
페이의 설명에 의하면 대충 상황은 이러했다.
고리 대금 업자인 더보스는 에텔 도시 북부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작위는 없지만 많은 귀족과 상인들 사이에 연줄을 두고 있는 인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먹는 음지에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부업으로 하는 것이 있었으니 힘없는 고아들에게 거주지를 제공해 주고 자릿세를 받아 챙기는 일이었다.
자릿세는 한 달에 1은화 20실링으로 지하터널이나 폐가 혹은 특정 골목에 권리를 사서 제공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더보스에게 매달 약속한 대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리더의 이름은 마크 제이제이로 15명에 아이들을 책임지는 15세 소년가장이었다.
어느 날 자신이 돌보는 식구 중에 병약해진 아이가 생겼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에레오 신전을 찾았지만 값비싼 약재료가 들어간 엘로우 포션(건강 회복 물약)을 마셔야만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엘로우 포션은 다른 신전에서도 에레오 신전에서 수입해 가져가는 것으로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가격은 50ml당 1금화 이었다.
엘로우 포션은 기본 100ml이므로 2금화가 필요 했던 것이다.
15명에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진 못해도 굶기지 않으려고 노력한 마크에게 2금화는 무척이나 큰 돈이었다.
고심 끝에 마크는 고리 대금 업자인 더보스에게 찾아가 도움을 구하게 된다.
더보스는 마크에게 15일마다 20은화이라는 이자를 요구하며 2금화를 빌려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2금화를 만들 길이 없었고 15일마다 20은화을 감당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이자를 내지 못하게 되자 한 달에 40은화씩 차곡차곡 적립되더니 이자의 이자를 붙여 점차 빚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원금 2금화의 이자가 23금화까지 쌓이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크는 그 후부터 거주지를 벗어나 도망자처럼 지내왔으나 결국 붙잡힌다.
그후 더보스로부터 30일 이내 돈을 갚지 않으면 마크를 사법시설로 넘기겠다는 통보를 받게된 것이다.
지금도 매달 1은화 20실링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막대한 돈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 하던 차,우연히 아론이 경비병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것을 쫓아 그 뒤를 밟았고 엘리샤의 집 문을 부순 것을 보게 된 페이는 큰마음 먹고 집을 털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보통 도시 사법 관리국이 움직일 때는 자택으로 강제로 밀고 들어가 집행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미행을 하였고 그 결과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라 설명했다.
“그렇다고 항아리를 다 들고 나오냐?”
“어차피 훔치러 간 건데.. 다 들고 나오는 게 당연하지!”
반성에 기미가 없군.
하지만 이유는 잘 들었다.
빚을 대신 갚아 줄 돈은 있다.
하지만 내가 그걸 갚아줄 의리는 없다,또한 엘리샤의 항아리에 든 돈을 써서도 안된다.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기 시작했다.
어제에 난 할 수 없지만 지금에 난 할 수 있게 된 것.. 그걸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페이..잘들어 봐.. 마크를 구하기 위해서 잠시 내가 하자는 데로 따라 줬으면 좋겠어”
내 이야기를 들은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해서 해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현재로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린 몇 가지 준비를 서둘렀고 다행히 그것은 순조롭게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잠시 페이를 데리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 크게 한건 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자자하게 퍼졌다.
엘리샤의 항아리를 일단은 제자리에 가져다 놔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두 번 세 번 움직이는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 없으니깐..
“그럼 항아리는 제자리에 갖다 놓고 바로 더보스를 만나러 가자”
“알았어...“
페이는 동생들을 안심 시킨 뒤 곧바로 길 안내를 시작했다.
솔직히 올 때는 헤그의 뒤를 미행해서 온 거지만,혼자 여길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페이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와 지름길을 이용해 곧바로 배르터 삼거리로 도착하게 되었다.
잠시 페이를 세워 둔 뒤,난 현관 입구 앞에다 두 개의 항아리를 놓고 힘 조절을 해가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는 재빠르게 페이가 있는 장소로 달려와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봤다.
이내 문이 열리고 바닥에 놓인 항아리들을 발견한 엘리샤는 그것을 알아보고는 단숨에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그 모습을 보니 뿌듯함마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물론 항아리에서 지출된 은화 20개는 내 자비로 채워 넣었다.
어쨌거나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내 책임이 컸으니깐.
“이제 가자”
페이는 엘리샤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내 뒤를 따랐다.
“헤에~ 저 언니,여자 친구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 보다 더 가까운 사이니깐..
같이 목 맨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야?
더보스의 저택은 북쪽에 위치한 노예 시장 부근이었다.
에텔 도시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이면.. 그곳은 바로 인간매매 시장이라 불리 우는 노예거래 시장이었다.
이곳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재력가 계층이 다수였으며 일부 평범한 옷차림에 사람들도 눈요기를 하기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확실히 시선을 확 사로잡는 마력 같은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이세계에 발을 디딘 예비 모험가로써 저 곳은 필히 조사해야 할 사명감 같은 것을 스스로 느끼는 바 다.
결코 여성의 신체를 눈으로 탐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끌어당기는 미지의 기운을 조사 하러 가는 것 뿐이다.
“노예 시장 처음 봐?”
“뭐?갑자기 무슨 생뚱 맞는 소리야?”
“눈이 빠져라 보니깐 하는 소리 아냐”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잠시 쳐다 본 것뿐이야..”
네가 어른에 대해서.. 남자에 대해서 뭘 알아?
내 모험 정신과 탐구심이 저 곳에 꼭 가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노예라는 개념은 아는데.. 어쩌다 노예가 되는지 혹시 알아?”
그때 잠깐이었지만 페이의 표정은 서글픈 그런 느낌을 비춰줬으나 이내 평소 표정으로 해맑게 설명해 주었다.
“대충은..가장 흔한 사례는 돈을 못 갚아 사법부에 끌려가면 판결에 따라 노예가 된다는 점 일까?그다음은 영주가 영지민을 상대로 집행을 했을 때나 전쟁이 발발해서 침략자에게 전리품으로 끌려와 매매 되는 경우.. 마지막으로 떠돌이 부랑민들이 헤드 헌터(머리 사냥꾼)에게 붙잡히는 경우라 할 수 있지”
“그렇군.. ”
도시 밖에 사는 고아들도 헤드 헌터나 노예 상인에게 걸리면 곧바로 노예가 되곤 한다.
적어도 고아들에게 도시는 무척이나 쾌적하고 안전한 장소임은 틀림이 없었다.
“여기가 더보스의 저택이야”
고만 고만한 저택들을 지나 멈춰선 곳엔 고만한 저택이 하나 보였다.
5층 정도 되는 정 사각 원목 건물로 루비어 저택은 커녕 귀족들의 별체와도 비교가 안되는 평범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엘리샤의 집보단 크고 넓어 보였다
현관 문 앞에는 똥개처럼 보이는 강아지 머리모양 조형물 장식이 있었고 입에는 둥근 고리가 물려 있었다.
페이는 그 고리를 잡고 조심히 문을 두드렸고 이내 문이 열리며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들어 냈다.
“음?너는.. ”
페이를 알아본 사내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문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집안엔 싸구려처럼 보이는 풍경화와 골동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40평정도 되는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올라온 우리는 더보스의 집무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볼품없는 로비와 복도에 비해 꽤 화려한 집무실 내부는 돈 좀 들인 티가 나는 편이었다.
페이를 알아본 이마가 벗겨진 50대 배불뚝이 중년 더보스는 담배 파이프를 꼬라물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업무용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키는 166 정도 되어 보였고 양손에는 보석이 박힌 액세서리를 빼곡하게 끼고 있었다.
“오~ 페이!나의 사랑스러운 요정 왔느냐”
이 인간은 페이가 여자아이 인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더보스 어르신”
페이는 모자를 벗은 후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난 그 옆에 서서 더보스를 관찰할 뿐이었다.
이런 사채업자 앞에선 태도를 명확히 해야 얕잡히지 않는 법이다.
내가 아무 힘도 없는 무능력자라면 모를까..
지금 입장으로썬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강한 첫 인상을 위해 태연하고 의연하게 연기할 뿐이다.
“그쪽 신사 분께선 무슨 용무로 이곳까지 오신 건지요?”
“사람을 찾아 왔습니다”
“사람?누구를?”
“마크 제이제이한테 용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마크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보스의 표정은 매우 흥미롭다는 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더보스가 페이를 한차례 노려보자 그녀는 몸을 움찔 떨더니 이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럼 저한테는 고객님이 되는 군요... 앉으시죠”
“과연 제가 고객일까요?”
난 여유 있게 미소를 지으며 롱소드를 소파에 걸치고서 자리에 앉았고 더보스도 내 앞에 앉아 양손을 모으고 엄지를 빙글빙글 굴리고 있었다.
페이는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크를 빼내려고 오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전 마크를 데리러 온 겁니다”
“그렇다면 마크가 나에게 25금화를 빚진 것도 알고 오셨겠군요..”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 짓는 얼굴로 대꾸했다.
“마크는 저에게도 20금화를 빚졌습니다.. 전 그 돈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더보스는 한쪽 눈썹을 떨며 페이를 바라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엔 용병 같으나 생김새는 타지 사람 같아 보였다.
어떤 인연으로 마크 제이제이에게 돈을 빌려 주게 된 것일까?
더보스는 그 점이 궁금했다.
“그렇다면 마크가 당신에게도 20금화를 빌려갔다는 차용증서가 있겠군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난 스마트 폰에 메모장 아이콘을 열어 더보스에게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크 제이제이는 화랑 에거시에게 금화 20개를 융통 받은 것을 인정 한다.이 돈을 갚지 않을 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아르아엔 태양력 1450년 4월 2일]
그리고 그 옆에는 마크의 싸인 제이제이가 휘날려 있었다.
페이는 마크로부터 글을 배웠다.
필체는 다소 달랐지만 마크의 싸인은 할 줄 알았다.
만약 페이가 싸인을 할 줄 몰랐다면 더보스를 속이긴 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이..이게 차용증서라고요?
더보스는 태어나서 이렇게 생긴 차용증서는 처음 본 눈치였다.
“어디 그쪽 차용증서도 좀 봅시다”
“자...잠시 할 말이 있소”
“뭐요?”
“내 비록 마크 녀석한테 2금화를 빌려줬지만 이자가 23 금화나 된다오.. ”
“아~?그래요?그러고 보니 난 이자를 계산하지 않았군.. 하긴 내가 사채업자도 아니고 그런 것을 넣어 뭐하겠나요.. 원금만 받으면 됐지”
더보스는 나에게 마크가 싸인 한 차용증서를 보여줬고 난 읽지도 못하는 증서를 대충보고 계획대로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더보스에게 날려줬다.
증서는 대기를 타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행동은 무척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20금화를 융통한 사람 입장에서 2금화짜리 차용증서는 하찮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행동이다.
“이걸 어쩌나?마크를 찢어서 나눠 가질 수도 없고... 더보스씨 당신은 이 문제를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더보스는 무척이나 번거롭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20 금화라니.. 간도 부었군.. 근데 화랑님께선 대체 그 녀석의 뭘 보고 이렇게 큰돈을 융통해 줬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사람이 너무 좋아 탈이라니깐요.. 성격이 이 모양이라 매일 여동생한테 구박을 받고 삽니다 하핫”
에~취!
엘리샤는 코를 쓸어내리며 항아리에서 돈을 꺼내 새고 있었다.
만약 이 문제를 사법부까지 끌고 가면 융통한 금액이 더 큰 화랑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다.
조합 간에 마찰이 아닌 이상,어지간하면 쉽게 쉽게 처리하는 것이 이곳 사법부에 현실이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화랑님께서 저에게 이 차용증서를 25금화에 구매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런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하는 걸 보니,내 생각대로 금액이 더 쌘 사람이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이 맞다는 이치를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더보스에게 따지고 들었다.
“나보고 금화 20개를 받아야 할 녀석 때문에 금화 25개를 더 쓰란 말입니까?왜 제가 그래야 합니까?차라리 내 증서를 다시 써드릴테니.. 내 것을 20개에 사주시겠습니까?”
“불가하오!나야 말로 2금화 때문에 20금화를 내라니!당치도 않는 제안이오”
“그렇다면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더보스는 내가 어떤 제안을 하는지 뚱한 표정으로 귀를 열고 집중했다.
내 제안은 간단했다.
에텔에서 공명정대하기로 소문난 막시무스 랏테 에우르고 공작님께 판결을 맡기는 것으로....
내 제안을 들은 더보스는 눈알이 튀어 나올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볼 살을 부르르 떨었다.
“막시무스 공작님은 그리 한가한 분이 아니오!우리 같은 시종 잡배를 상대해 주실 것 같소?”
“말 조심하세요..제 일이라면 기꺼이 그분은 나서 주실 겁니다”
“허..어..”
더보스는 등을 의자 뒤로 젖히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이게 만약 허세라면 좋겠지만 진짜라면 2금화에 아이를 착취한 천하에 몹쓸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붙게 될지도 모른다.
액수에서부터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공작가가 이런 일에 개입하게 되면 그쪽과 연줄이 전혀 없는 더보스 입장에선 개망신은 피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