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구름이 벗겨낸 달이 연못을 비추자 새하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여자가 몸을 반쯤 담그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감고 있었다. 머리칼이 어찌나 검은지 마치 밤을 그대로 뒤집어쓴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자 얼굴이 드러났다. 백지처럼 하얀 얼굴은 달빛을 받아 창백하기까지 했다.
거리가 있음에도 선명하고 또렷이 보이는 이목구비에 백조처럼 가는 목을 지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에 시선이 닿자 소년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입이 바짝 말라서 침을 꿀컥 삼킨 소리가 머릿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렸다. 소년은 그 소리가 여자한테까지 들렸을까 싶어 몸을 바짝 움츠렸다.
‘정말 느시무네가 있다면 저 여자일거야.’ 혹시라도 여자가 이쪽을 볼까 두려우면서도 눈은 계속 그녀에게 붙어 있었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그와 함께 그녀를 훔쳐봤다.
“우꾸-꾸구르르.”
소년은 등짝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허둥지둥 몸을 낮추고 소리 난 곳을 살폈다. ‘밤줄박이잖아, 어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자연스레 고개가 다시 여자 쪽으로 돌아가다 덜컥 멈췄다. ‘뭐 하는 거야, 애런! 목욕하는 아자니를 누가 훔쳐본다면 어떻겠어?’ 애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담벼락 위에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다 슬쩍 여자를 보았다.
그녀가 정면으로 여길 보고 있었다. 눈이 확 커진 애런은 높은 바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릴 때처럼 가슴이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채 나무에 달라붙어 숲의 일부인 것처럼 숨만 잘게 쉬었다. 여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애런은 손으로 입을 막고 폐에 가득 찬 숨을 가늘게 빼냈다. 뼈마디에서 나는 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는데 근처의 나무들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애런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미간을 모았다. 무성한 관목 사이로 가면을 쓴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서 누가 본다고 얼굴을 가렸지?’ 검은 옷에 등에 검을 멘 그는 애런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목욕하는 여자만을 주시했다. ‘저 정도 몸집이면 남자가 분명한데.’ 애런은 검집을 고쳐 쥐고 남자를 계속 살폈다.
마침 여자가 연못에서 나와 물가에 있는 큰 바위 뒤로 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쓴 자가 관목에서 튀어나와 바위를 향해 달려갔다. ‘이런!’ 애런은 망설임도 없이 뛰어나왔다. 바위에서 더 가까웠던 애런이 양팔을 벌리고 그를 막아섰다.
“멈춰!”
바위 뒤에서 헉 하고 여자가 짧게 소리냈다. 애런의 갑작스런 등장에 상대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마에 짧은 뿔이 양쪽으로 튀어나오고 눈매가 길게 찢어진 가면 속에서 파란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드러난 입부분은 웃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헝클어진 머리에 앳되보이는 소년임을 알아본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애런은 서둘러 검을 뽑아 들었지만 자신보다 큰 상대의 그림자가 몸에 드리운 것만으로도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뭐.. 뭐야, 내가 왜…?’ 심장이 양쪽 귀에서 텅텅대고 다리는 떨리다 못해 무릎이 풀려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이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턱 밑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아. 침착하자, 연속 공격도 고치고 드디어 아빠의 비기도 성공했잖아.’ 애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바위 뒤의 여자에게 말했다.
“거.. 거기, 험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피해.”
가다듬지 않은 목소리에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대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남자는 등에 멘 검을 뽑으려다 잠시 멈추더니 맨손으로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맨손으로? 휴, 다행이야. 뭐? 다행이라니. 젠장!’ 애런은 배에 힘을 꽉 주고 소리쳤다.
“물러서!”
연못에 울리는 외침을 신호삼아 남자가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애런도 반사적으로 검을 내리쳤다. 남자가 살짝 빗겨 피하면서 허공에 선이 그어졌다. 두번째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남자의 주먹이 얼굴에 박혔다. 악! 버틸 겨를도 없이 뒤로 나동그라져서 바위에 몸을 부딪혔다. ‘으-. 주먹이 완전히 돌덩어리잖아’. 웅웅대는 코에서 피가 주륵 쏟아졌다. 소매로 코를 문지르다 닿은 입술이 불에 데인 것처럼 쓰라렸다.
애런은 벌떡 일어나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리저리 휘두르는 검이 사방에서 번쩍였다. 남자가 작은 동작으로 가볍게 피하며 발로 가슴을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뒤로 굴러 자빠졌다. 가슴을 움켜쥐고 꼼짝을 못하다가 커억 하고 갇힌 숨을 내뱉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애런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검을 고쳐잡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해보자.’ 이를 악물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공격했다. 보이지 않는 칼날 대신 쉭 쉭 소리와 검광이 남자를 에워쌌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남자의 옷자락조차 건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휘두르는 검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남자의 가면 아래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지금이야!’ 상대의 어깨와 목 사이에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검을 꽂아 넣었다. 남자가 팔뚝으로 가볍게 검을 쳐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난 검이 옆으로 흘렀다. 남자의 찢어진 소매 속에서 사슬완갑이 반짝였다.
‘이런!’ 곧바로 애런의 왼쪽 눈에 주먹이 꽂혔다. 번쩍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사이 턱에 다음 주먹이 박혔다. 골이 흔들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리가 저 혼자 이리저리 땅을 짚어대는 동안 머리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가까스로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섰는데 배로 주먹이 훅 들어왔다. 시큰하고 뻐근한 통증이 위와 내장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컥!”
애런은 검을 놓치고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피와 뒤섞인 위액이 튀어나와 바지를 적셨다. 남자가 바닥에서 애런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 검에 손대지마!’ 애런은 땅을 짚고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후들거리기만 할 뿐 일어날 수가 없었다. ‘틀렸어, 더 이상은. 저 여자라도….’
“어..서…, 도망..쳐….”
바위 뒤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다행이다.’ 남자가 애런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달빛이 검에 부딪혀 희뿌연 빛무리가 일었다. 그 속에서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10년을 노력했는데 복수도 못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이렇게 죽는구나.’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자가 차갑고 매서운 눈으로 망설임 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잘 있어, 아자니.’ 애런의 목을 향해 푸른 검광이 날아들었다.
“퍽!”
애런의 머리 위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남자가 검을 놓치면서 도끼질을 견디지 못한 나무가 쓰러지듯 뒤로 넘어갔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애런은 자기 머리를 더듬어 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떨어진 검을 얼른 챙겨 남자를 겨누었다. 뱀에 물린 것처럼 들썩이던 팔다리가 곧 잠잠해졌다. 애런은 검끝으로 다리를 살짝 건드렸다. 남자는 사지를 바닥에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가면은 이마에서 한 쪽 눈두덩이까지 깨져 있고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놀라 뒷걸음질 친 애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숨결이나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애런은 목청을 높여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 대신 폭포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두리번거리는 애런의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