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에 자욱한 안개가 걷히면서 떡갈나무 잎에 수분이 가득 맺혔다. 잎의 고랑을 타고 온 작은 물방울들이 뭉쳐 한 방울의 이슬이 되었다. 하늘과 태양과 숲 전체가 그 속에 담겼다. 이파리 끝에서 저울질하듯이 흔들리던 물방울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갈색 눈꺼풀에 부딪힌 이슬이 여러 방울로 부서졌다. 작은 방울들마다 각각 하늘과 태양과 숲이 담겨 있었다. 감긴 눈꺼풀 밑이 꿈틀거렸다. 또 다른 이슬이 떨어지는 순간 눈꺼풀이 열렸다. 눈동자에 부딪힌 이슬은 제자리를 찾은 양 눈 안에 그대로 고였다.
애런은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폭포소리가 밤보다 작게 들리는 것 말고는 다를 게 없었다. ‘맞다!’ 상의를 들추고 몸을 내려다봤다.
가슴 한복판에 손바닥 모양 같은 멍이 새까맣게 찍혀 있고 그 주변으로 가슴에서 배까지 숯검댕이를 문질러 놓은 것처럼 시커멓게 얼룩져있었다. 살살 짚기만 해도 쑤시고 욱신거렸다. ‘꿈이 아니었어?’
고개를 뒤로 돌리는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누워있었다. 애런은 엉덩이를 붙인 채로 손발을 허둥지둥 놀려 거리를 두었다. ‘그.. 그럼?’ 선델리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못 본 걸로 해줘.’ 소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빠져나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래, 그 애랑 이야기를 하다가 저 남자한테 맞은 게 잘못됐는지 갑자기 가슴이 아프면서 숨을 쉴 수 없었어. 그 앤 잘 갔으려나,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몇차례 땅을 되짚고 나서야 겨우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살짝 바람이 불자 머리와 얼굴에서 쉰내가 물신 풍겼다. 속까지 메스꺼워 인상을 찌푸렸다. 애런은 남자의 시신을 다시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면 들짐승들 밥이 될거야.’
한 시간 뒤, 애런은 집에서 삽과 곡괭이를 챙겨왔다. 그 사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점점 열이 올랐지만 쉬지 않고 연못 근처에서 양지바른 곳을 찾아 땅을 팠다. 곡괭이로 찍을 때마다 온몸이 말뚝 박는 망치로 두드려 맞는 것처럼 결리고 쑤셨다.
‘왜 그 애한테 달려들었을까? 이 사람도 가족이 있을까? 가족들은 이렇게 죽은 것을 모른 채 마냥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더 정성 들여 무덤을 만들었다.
오한이 나는 것을 참아가며 주변의 잡초까지 다 뽑고 무덤 옆에 앉아 물을 마셨다. 챙겨놓은 남자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쓰지도 않았어. 맨손으로 상대해도 충분하다고 확신한 거야. 이 사람이 강한 걸까, 내가 약한 걸까? 그때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애런은 서늘해진 목덜미를 문질렀다. ‘작은 나뭇가지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해. 그런 것을 배운다면 갤런드를 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물병을 내려놓고 그의 검을 살폈다. 곳곳에 찍히고 패인 흔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낡은 검보다 상태가 좋았다. 길이는 한 뼘 정도 짧았지만 쥘 때 손이 착 붙는 느낌이 좋았다. 검을 뽑자 서늘한 푸른빛이 눈에서 뺨으로 길게 어렸다. 거울 같은 검날에 눈두덩이 퉁퉁 부어 내려앉은 갈색 눈이 비쳤다. 공포에 질린 아홉 살 아이의 눈이었다.
순간 목이 서늘해지고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가슴에 칼을 맞는 아빠가 보였다. 소리 없는 외침과 함께 그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에 꽂혔다. 착! 애런은 검집을 닫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불덩이 같은 열과 오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뒤로 나흘 동안 애런은 고열과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나무에 거미줄로 매인 사람을 보았는데 바로 자신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허물처럼 반투명하게 변했고 속으로 뭔가 비쳐 보였다. 갑자기 얼굴 여기저기가 쩍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눈이 여러 개 달리고 갈고리 같은 입을 가진 커다란 벌레 머리가 튀어나왔다.
또 다른 꿈에서는 숨을 쉬지 못해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디선가 아자니가 나타나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주자 겨우 숨이 트이는가 싶은데 갑자기 아자니가 검은 머리의 소녀로 변했다. 애런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젖히려고 했지만 빨판처럼 착 달라붙은 그녀의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눈에서 새빨간 빛이 나자 뱃속이 데인 것처럼 뜨거워졌다가 얼음처럼 차가워지면서 내장이 전부 녹아 진득한 체액이 되었다. 그녀는 젖을 먹듯 애런의 체액을 한 모금씩 천천히 빨아 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빼앗긴 애런은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변해버렸다.
혼자뿐인 오두막에서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나흘이 지나자 열이 사라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몸이 더 가볍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소녀가 준 연고가 효과가 좋았는지 몸의 상처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검은 머리의 소녀는 선델리아에 잘 도착했는지 궁금했지만 그 답은 앞으로 평생토록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날 밤에 본 그녀의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남았다는 것이었다.
몸을 추스르면서 항상 납품하는 양 말고도 시장에 팔 요량으로 땔나무를 더 했다. 집에서 도시까지 지고 가기가 좀 버겁지만 운이 좋아 다 팔렸을 때 주머니가 묵직해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장에 갈 준비를 하다 벽에 걸린 회색 머리띠가 눈에 들어왔다. 본래는 감청색이었던 천은 물이 빠질 대로 빠지고 여러 곳이 해어져 있었다. ‘나 엄마한테 바느질 배웠어, 이거 내 첫 작품이다.’ 녹색머리 꼬마가 조막손으로 머리에 감아주는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은 아자니랑 켈리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까?’
가방을 메고 창고에 있는 나무들을 수레에 실었다. 일반 땔나무는 가장 안쪽에, 그다음은 카펜터 아저씨 공방에서 주문한 원목…, 끝으로 존 아저씨의 붉은 입술에 들어갈 화덕용 장작까지 싣고 보니 나무더미가 팔을 올려도 닿지 않았다. ‘너무 욕심을 냈나.’
수레를 끌어보니 역시나 아무리 힘을 써봐도 바퀴만 조금 흔들릴 뿐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바퀴에 기름을 좀 쳐주고 다시 수레 앞에 섰다. 어깨를 풀어준 뒤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속이 청량하고 시원한 기분이 들면서 머리까지 맑아졌다. 손잡이를 꽉 잡고 두 발로 땅을 힘껏 밀어내자 수레가 앞으로 움직였다.
‘배달 끝내고 카펜터 아저씨한테 바퀴 좀 봐달라고 해야겠다.’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수레였지만 오늘따라 걸으면 걸을수록 발에 부담이 덜한 게 오르막에서도 평소와 거의 같은 속도를 내었다. 등골을 타고 땀이 줄줄 흘렀지만 아자니와 맛있는 음식을 함께 할 생각에 미소가 피었다.
“여어, 애런, 오늘 나무 좀 해왔네.”
마을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이 아는 체를 했다. 애런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앞을 지나갔다.
“저놈은 한 번도 제대로 인사를 하는 적이 없어. 애비애미 없는 것들은 뭘 해도 티가 나.”
“브랜든을 생각하면 저럴 만도 하지, 뭐.”
“그게 우리 탓이야? 그땐 나도 같이 싸웠다고. 벌써 십 년이나 지났어. 난 사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나아. 세상이 바뀌었으면 거기에 맞춰서 사는 거지. 어린놈이 똥고집은.”
“그나저나 요즘 호위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장군님이 직접 순찰하시는 것도 늘었어. 숲까지 돌아보시고 뭔 일이 있는 것 아냐?”
“며칠 전에 기렌하고 마르코가 죽은 것 몰라?”
“뭐야? 호위대에서 검술 실력이 제일 좋은 친구들이 왜?”
경비병이 기울어진 헬멧을 고쳐 쓰고 얼굴을 들이댔다.
“쉿! 장군님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