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백욱인
출판사 - 휴머니스트
쪽수 - 364쪽
가격 - 19,000원 (정가)
1. ‘번안’이라는 키워드로 분석하는 한국 근대
- 반복된 번안이 감춘 식민 지배의 흔적을 파헤치다
급격한 사회 변동기나 바깥으로부터의 문화가 격심하게 몰려올 때, 배경과 형태를 수용자에게 맞게 바꾸는 번안 작업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번안은 모방에서 시작되지만 그 과정이 낳는 번안물은 번안하는 주체의 사회적 배경, 환경, 특성 등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창의성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번안에 번안을 거듭하는 ‘이중 번안’은 대체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 타인의 모방물을 모방하기 마련이라 원본이 자리 잡았던 사회·문화적 배경과 맥락을 사라지게 만들거나, 정체불명의 번안물을 양산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근대화 시기에 번안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은 서양을 직접 대면하는 대신 일본을 통해 서구의 근대 산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이 한 번 번안한 ‘일본식’ 양식을 번안해야 했는데, 이것이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과정에 차용되어 다시 한 번 번안된다. 그렇게 해서 이룬 근대화는 과연 한국 사회를 모두가 동경하고 따라잡고 싶었던 그 모습으로 바꾸어놓았을까? 과연 우리가 동경하고 따라잡고자 한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뿐만 아니라 반복된 번안의 역사는 식민지 시대가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우리 일상에 식민성이 과연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현실을 가져다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식민 잔재의 청산을 말하는 동시에 식민지의 유산을 향유하는 모순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이 번안물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국 근대를 재조명하는 한편, 거기서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 살피고자 했다.
해방 후 일제는 온갖 일본식 양풍의 산물을 이 땅에 남기고 돌아갔다. 곧이어 미군이 진주한 남한에서는 일제의 양풍과 새롭게 들어오는 미국풍이 공존했다. 이 땅에는 사회제도에서부터 의식주,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식민지 번안풍과 새로운 미국풍, 전통의 잔존물이 공존했다. 왜곡된 근대, 진행 중인 근대 그리고 전근대가 뒤섞이면서 혼종 간 싸움이 벌어졌다.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혼종과 위로부터 강제된 혼종, 바깥에서 강요된 혼종과 안에서 주체적으로 만든 혼종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혼종이 이루어졌다.
(‘프롤로그’ 중에서)
2. 한국 사회의 일상 곳곳에 자리한 번안물들의 정체를 밝히다!
- 우리가 먹고, 쓰고, 즐기고, 누리는 그 모든 것의 기원
이 책은 1930년대 식민지와 1960년대 근대화의 현장을 오가며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번안의 흔적을 살펴본다. 패션, 음식, 주거, 도시환경 등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시작해서 소설, 만화, 미술, 버라이어티 쇼, 음악 등의 문화·예술 장르는 물론이고 기술, 학문, 언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 번안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중 번안이 1960년대 산업화 시대에 왜, 어떻게 그대로 반복되었으며 현재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 주목했다.
1960년대 학교의 조회 풍경이 1930년대 애국조회 풍경과 닮아 있는 것이나 그때마다 실시한 ‘국기에 대한 맹세’가 식민지 시대 ‘황국 신민의 서사’를 읊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 ‘교복’이나 ‘새마을복’ 등을 통해 국민의 몸을 통제하고자 하는 국가의 움직임이 다름 아닌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아파트 단지나 고가 건설 등 근대 서울의 재편이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베껴와 진행된 것이라는 사실 등 우리가 늘 접해온 일상 영역의 번안 사례는 가볍고 흥미롭게 읽힌다. 2008년에 등장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 방송이 경제공황기 루스벨트 노변담화의 번안판이라는 것은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근대어, 학문, 종교 등에 남은 번안의 흔적을 확인하는 데서는 차마 책장을 가볍게 넘기기가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영어’만은 꼭 배워두십시다", "입신출세는 중학생부터 준비해야" 등의 광고가 만들어낸 입신출세주의가 해방 이후에도 대학 입시와 사법고시를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을 통해 근대 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땅한 번역어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에 ‘보그ㅂㅅ체’나 ‘인문ㅂㅅ체’가 만들어졌는데도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한 현실을 지적한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번안의 맥락을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 이 책에서 살핀 한국 사회 곳곳의 번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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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대한 자료로 확인하는 번안의 역사
- 판박이같이 닮아 있는 1930년대와 1960년대 풍경
일제강점기나 1960년대 산업화 시대를 각각 근대화의 측면에서 특정 주제로 조명한 책은 있었지만, 이 두 시기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한국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훑은 것은 백욱인 교수가 처음이다. 사회학자인 그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각 번안물들의 기원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1930년대와 1960년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했는지, 더 나아가 우리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일상의 문화사를 살핀 만큼 이 책은 각종 대중매체에서 발췌한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실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광고, 만문만화 등은 물론 당대 쓰이던 라디오, 달력, 미술품, 간판 사진에 이르기까지 당대 일상을 보여주는 도판을 선별했으며, 번안의 흔적을 살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치했다. 이를 통해 1930년대와 1960년대 이루어진 번안의 연속성과 차이뿐만 아니라, 시간차를 두고 서양-일본-한국에 근대 문물이 들어와 각각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시각적으로 직접 비교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우리 고유의 것이라 생각했던 유산이 서양문물의 일본식 번안판으로 밝혀지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다.
4. 근대사의 비극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 ‘번안 사회’의 민낯을 대면해야만 하는 이유
세계 어디에나 번안물은 존재한다. 저자는 우리가 행한 ‘번안’이라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식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그것을 무신경하게 수용해온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1960년대 산업화 시기 가난과 무지로 인해 우리는 식민지의 비극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때의 과실을 ㅁㅁ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시간이 흘렀고 상황도 변했지만 번안의 유산은 도처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식민 지배가 남긴 흔적을 통해 제국과 식민지 모두를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타협과 투쟁이 이어지던 일상의 장소에서 그들이 섞이며 만들어낸 결과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래서 그것을 평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전통이랍시고 식민 지배의 유산을 복구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번안물은 영구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목 차
프롤로그 번안의 제국과 식민지의 번안-7
1부 제국의 번안과 식민지
1. 사진 식민지 풍경 뒤에 숨은 제국주의의 시선-21
2. 근대어 한국 근대어에 남은 지배의 흔적-31
3. 성경과 찬송가 성경과 찬송가 국역의 길고 오래된 역사-40
4. 교육 ‘교육칙어’에서 ‘국민교육헌장’으로-53
5. 학문 식민지 시대의 앎과 힘-66
6. 과학 권력과 손잡은 과학기술-77
7. 기술 금성 라디오에 담긴 기술 번안의 역사-89
8. 기독교와 교회 구원과 정치 사이-105
9. 베트남전 귀국 박스에 담긴 근대와 남겨진 역사-114
2부 번안 사회의 생활문화
10. 경양식 일본식 서양 요리를 번안한 돈가스-131
11. 밀가루 식탁 위의 근대화-140
12.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만든 대중의 입맛-149
13. 식품업 일본이 심은 근대의 맛-159
14. 패션 일제강점기 ‘국민복’에서 1970년대 ‘새마을복’까지-170
15. 한복과 양장 서양의 디자인과 재료를 입다-181
16. 고무신 식민지 시대의 성공한 번안물-192
17. 모자 신분을 벗고 개성을 쓰다-203
18. 도시 지배의 욕망으로 얼룩진 서울-215
19. 문화주택 서민이 꿈꾸던 주택의 상징물-225
20. 주택단지 한강 변 아파트 단지와 광주 대단지-236
3부 번안과 대중문화
21. 라디오 전파로 수신하는 근대-251
22. 대중미술 ‘이발소 그림’ 속 이상한 근대-264
23. 만화 신문 삽화부터 텔레비전 만화영화까지-276
24. 흥행업과 극장 쇼 근대 대중오락의 역사-288
25. 유흥업 카페, 카바레, 블루스의 귤화위지-299
26. 국민가요 이 노래를 불러라-311
27. 번안 가요 표절과 번안의 시대를 넘어서-322
에필로그 역사의 비늘을 떼어내며-336
주-344
찾아보기-354
트로트와 엔카도 상관관계를 부정하는 얘기도 있지만 비슷한건 왜일까?...자라면서 자연스레 익혀지는 생활문화. 익숙함의 무서움...한번 빠지면 부정하면서도 헤어나질 못하는 추억팔이 문화들의 무서움이란...익숙한 오덕문화만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