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형을 선고받은 프란츠 슈탕글을 취재하는 기타 세레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국가폭력 행위에 가담하여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와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을 역임하며 약 90만 명을 학살한 책임을 지고 있는 전범 프란츠 파울 슈탕글
그는 종전 이후 친나치 성향의 바티칸 성직자의 도움을 받고 시리아로 탈출하였고 최종 목적지인 브라질에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우습게도 그는 신분 조차 바꾸지 않고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폴크스바겐 브라질 지사에 16년이나 근무하는 등, 뻔뻔스러움을 보였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는 결국 브라질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서독으로 인도되었고, 6년 전 아이히만이 그랬듯이 본인이 스스로를 변호하며 자신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였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면서도,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명령이었기에 그저 따랐을 뿐이며, 자신은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죄가 인정되어 1970년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그는 언론인 기타 세레니와 장기간 만남을 가지며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행위가 옳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세레니의 끈질긴 질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유죄’라는 점은 끝까지 부정하며 현실에서 도피하였다
그 외에도 슈탕글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희생자들을 일컬어 ‘연민의 눈빛’을 가졌다고 표현했지만 그들을 결코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않고 화물, 짐승 등으로 지칭하였고
자신이 처음 ‘최종 해결’ 에 대한 선택을 내렸을 때에는 크나큰 두려움을 느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업무’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기타 세레니와 프란츠 슈탕글은 약 6개월간 만남을 가지며 70시간에 달하는 인터뷰를 하였고, 결국 마지막 만남에서 기타 세레니는 슈탕글로부터 그가 저지른 행위가 ‘유죄’임을 인정하는 대답을 받아냈다
프란츠 파울 슈탕글은 마지막 취재가 끝난 후 19시간이 지난 1971년 6월 28일, 심장발작으로 사망한다